우리 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였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몇 걸음 가다가 왼손을 허리에 대고 한 번 쭉 펴고 또 구부정한 몸으로 걸으셨다. 마을 타작마당에서 쉬고 모랭이 논으로 가는 길까지 숨을 쌕쌕거리며 걷는 모습을 기억하는 내 마음 속 사진 장면은 그리 많지는 않다.그런 꼬부랑할머니를 따라 이웃집 원평띠기 할매집에 놀러간 적 있다. 날이 저물어 할매는 저녁을 먹고 가라 했다. 며느리 평강띠기 아지매랑 같이 살았는데 그 집에는 남자 어른이 없었다. 아마 있었다면 밥을 같이 먹고 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옛 기와집에 양철을 덮은
가을 가뭄에 농사일이 일찍 마무리되었습니다. 또 한 번의 가을을 어찌 맞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어찌어찌 가을이 넘어갑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봄가을 농번기가 훨씬 정신이 없었는데, 작년 다르고 올해는 또 다르게 느껴집니다. 어느새 집 앞으로 경운기가 3단 기어를 넣고 전속으로 달리던 풍경이 사라지고, 마을 분들의 나이와 반비례해서 농기계들의 속도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당연히 농사일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또 자주 보이던 분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안부를 여쭈면 낙상사고가 일어났다거나 가벼운 시술을 하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
“현실을 인정하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분열되지 않고는 제대로 살아가기 힘든 지금, (이 지금은 계속된다) 숱한 조언들이 차고 넘친다. ‘적극적으로 하라’ 와 ‘적극적으로 하지 마라’가 극단적으로 나뉘며 자기계발의 지침들은 그때그때 입맛에 맞춰 조립된다. 누구, 또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영화 (이하 에브리씽)은 “아무도 믿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은 이른바 ‘다니엘스’라 불리는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 두 사람의 감독이 만든 영화다. 다른 우주에 또 다른 나의 존재(
1. SNS 세계에 계시는 현인, 의인, 명인, 도사, 자유인…출근해서 아이들을 맞이하고, 선생님들 계시는 교무실에 가서 인사하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눈 뒤 내 방으로 돌아와 그 전날 올라온 결재 서류와 오늘 일과를 확인하면 하루가 시작된다.해야 할 일은 참 많다. 월말까지 보내야 되는 공모 서류와 다음 달 초까지 보내야 되는 공모 서류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어제 했던 철학 수업 내용을 정리해 놓고 다음 주 수업할 내용을 조금 고쳐야 한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워한다. 사실 어려운 과정이다.본격적으로 문서 작업을 하기 전에 몇 개
육회의 대중화를 가로막는 어려움 중 일부가 극복되는 곳이 우시장과 도축장이 있는 지역이었다. 서울 함평 익산 영천 대구 함안 진주 등지가 그런 곳이다. 하지만 이런 지역에서도 육회는 잡자마자 바로 소비해야 하는 시간적 한계에 묶여 있었다. 그것을 극복시켜 준 것이 냉장기술의 발달이었다.우리나라에 얼음공장이 생기고 냉장기술이 도입된 것은 1910년대 이후이다. 겨울철에 먹던 평안도의 메밀국수가 서울에서 여름철 대중 음식 '평양냉면'이 된 것도 당시 도입되기 시작한 냉장기술과 얼음공장 설립 그리고 아지노모토(MSG) 덕분이라고 한다.
겨울이 춥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지수 마을에서 친척 오빠랑 언니가 우리 집에 왔다. 하룻밤을 자고 한벌 이모집(나에겐 고모)에 간다고 했다.나무하러 가야 하는데 그날은 그 언니 오빠를 따라나섰다.모랭이 논을 지나 삼장으로 이어진 신작로를 따라 아이 넷이 걸어갔다. 지수 고모집 오빠는 중학생이었을 것이다.두 여동생과 함께 외가인 우리 집에 왔으니 오빠가 우리들 인솔자인 셈이었다. 신작로에 다니는 차는 버스 몇 대뿐이었을 것이다. 돌을 튕기며 다녔던 시골버스는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걸어가는 동안에는 지나가지 않았다. 보안마을을 지나 더
서울광장 일대에서 ‘9·24 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 3만5천명 참가자들은 '924 기후정의선언문'을 통해 ‘화석연료와 생명 파괴 체제 종식’, ‘모든 불평등 해결’,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 우선 반영’ 등을 핵심 요구로 제시했다. 참가자들은 부자가 야기한 위험이 가난한 이들을 기후위기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불평등을 지적하면서,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기후위기의 원인이고 현재"라고 주장했다.지금은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 수준이다. 동식물 및 해양 생물의 멸종, 저지대국가들의 침수 등이 가속되는 가운데 올해는 살인적
2001년 4월 4일, 난 모스크바 시내에서 열린 '다닐 샤프란 추모음악제'에 갔었다.오늘은 그날 듣고 더 큰 감동을 받은 음악을 소개하려 한다.스산한 바람이 부는 이 가을에 첼로 소리가 더 짙은 스산함을 데려오는가.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삼중주 '위대한 예술가를 기리며'를 실연으론 처음으로 들은 날이다.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동료 교수이자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인 친구 니콜라이 루빈슈떼인을 추모하며 만든 음악이다.니콜라이 루빈슈떼인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연주불능이라 혹평하며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었는데 후에 이 곡의
본격적인 가을농사철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진짜 바빠서 여우가 애를 업고 가도 모를 철이지만, 요새는 애가 없어서 뺏길 일도 없겠습니다. 어쨌건 이렇게 한 바쁨이 있기 전에 농가에서는 서로 간에, 지난여름에 수확한 깨나 고추가 남은 것이 있냐고들 연락을 하고는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여름에는 가뭄과 폭염, 폭우 3종 세트가 겹쳐 ‘기후위기란 이런 것이다.’ 라고 대놓고 경고를 하는 셈이었지요. 그러니 전국적으로 밭곡식이 흉작이었습니다. 어쩌다 잘 된 집도 있지만, 시쳇말로 그것은 재수가 좋았던 것이고 대부분은 평년에 못 미치는 형국
비상구 천지경 밤안개가 아파트 계단까지 스며있다야근의 피로가 누적된 다리로한 층 계단을 오를 때마다지친 눈 깨워주는 사람환한 세상 향해 비상을 꿈꾸며 달리지만 한번도 그 문을 벗어나지 못한사람유심히 나를 내려다본다 노름꾼 아버지 횡포에 시달리던 어머니충혈된 눈동자로 바라본 세상의 불빛이 저랬을까마음은 늘 비상등 속 저 사람처럼계단을 향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자식들 가파른 계단 내딛는 걸음 지켰을 어머니 부릅뜬 눈, 저 비상구 불빛두터운 어둠 물리치고 있다 이제 집 밖이 무섭다는 칠순의 어머니침침한 눈으로 남은 세상 더듬어간다내 밤눈
육식은 진화과정 중 우리 DNA에 새겨진 본성이다. 육식과 불을 이용한 요리를 통해 두뇌가 커졌고 체격은 건장해졌다. 이러한 생물학적 토대는 진화적 선순환의 수레에 우리를 올려놓았다.지혜와 체력이 생겼고 이것은 다시 조직과 문화를 낳았다. 조직과 문화는 더 많은 먹거리를 쉽게 확보할 수 있게 했다.드디어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육식이 오늘날 우리를 만들었다. 육식 없이는 균형 잡힌 영양을 공급하기가 불가능하다. 아미노산 비율이 그러하고 비타민의 함량이 그러하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고기를 많이 자주
2022년 설 연휴를 붙잡으려고 개봉한 영화 , , 의 성적표는 부진했다. 물론 아직 코로나19의 그늘이 짙었다. 그러다 드디어 5월, 가 천만 관객의 축포를 쏘아올렸다. 대작이라는 수식을 업고 시장을 엿보던 가 7월부터 줄줄이 스크린을 붙잡았다. 그리고 9월, (이하)이 잡은 스크린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이 가운데 , , 는 남성 영웅 또는 남
할아버지는 소죽 다라이 들고 가시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 그날 이후 지팡이 두 개를 짚고 겨우 마당을 거닐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예 걷지를 못하셨다. 사랑채 반쪽짜리 방에서 앉았다, 누웠다 3년을 그렇게 보내셨다. 중학생이던 나는 반쪽짜리 옆방에 공부방을 마련하고 할아버지 수발을 들었다. 흙벽에 붙은 황토가루가 떨어지고 쥐가 갈그락 또는 갉그락, 빈대가 살갗에 달라붙고, 늙은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소리에 껌쩍껌쩍 놀래는 양철지붕을 머리에 두고 내 청소년 시절 3년은 그렇게 할아버지 숨소리 멎지 않은 공간에서 흘렀다. 벽사이
확실히 ‘미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현재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미래’와 만나게 된다. 여전히 현재를 살고 있는 나와 우리인데, 반드시 다가올 ‘미래’를 이렇게 애써 당겨 경험해야 할 만큼 그 ‘미래’가 절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세상의 흐름은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미래를 나타내는 영어 ‘future’의 어원은 의외로 간단하다. “that is yet to be; pertaining to a time after the present”(아직 오지 않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과 연관되는)로 풀이해 놓고 있다
모처럼 긴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지는 제주도.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이번 여행이 사실상 첫 제주방문이었다. 제주에 머물며 바라본 이색적인 풍경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과 깨달음을 주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세차게 와 닿은 건 제주 강정마을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진심’이었다. 그들의 ‘진심’이 마음을 울렸다.평화의 섬 제주에 해군기지를 짓겠다며 구럼비 바위를 폭파한 지 10여년, 제주해군기지가 강정마을에 들어선 지도 7여년이 지났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 숱한 이슈들이 휘발성 있게 소진되지만, 제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산울림의 노래 '청춘'이다. 꺾거나 굴리지 않는 음색이 좋고, 곡조에 담은 그만의 언어가 좋고, 짓는 미소와 천진한 그림까지 나는 김창완이 좋다. 어언 40년 묵은 '청춘' 또한 함께 늙으며 흥얼거려온 곡조다. 근데 그 노랜 청춘이란 주제의 언어치고는 너무 매가리가 없고 체념적이라 그답지 않다 여겨왔더라.얼마 전 TV에 출연한 그의 회고를 들으며 연유가 풀렸다. 애당초 붙인 가사는 "갈 테면 가라지/ 푸르른 이 청춘"이었는데 음반 사전 심의에
유근종 작가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틀즈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비틀즈의 음악이 끊임없이 리바이벌되거나 노래가 아닌 다른 장르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음악이 얼마나 많은 영감과 감동을 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앞서 소개한 비틀즈 음악들은 기타를 위해 편곡한 곡들이었고, 이번에 소개할 음반은 현악사중주를 위해 편곡한 연주 음반이다. 대표적인 비틀즈 음악을 편곡한 음반들을 한 번 소개해볼까 한다.그중 가장 유명한 음반을 들라 하면 아마도 베를린 필의 12 첼리스트가 연주한 음반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
1966년생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족 박문혁 동무는 훈춘 출신이었다.1990년 당시 산동성 제남에서 직장을 다녔고 동갑내기 아내는 중국국제여행사 가이드였다. 중국 여행 취재를 위해 지인이 연결해줬는데 가이드비가 경비를 초과해서 취소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위해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적산 법화원 장보고 사당, 곡부 공자 사당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무모한 도전이었다. 중국 현지 사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덤빈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바퀴가 달아날 것 같은 버스를 타고 세 시간 넘
귀농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생산수단은 단연코 질 좋은 농지입니다. 농기계는 임대소에서 빌릴 수도 있고, 농기구는 정보만 알면 어디서든 구할 수가 있고, 씨앗이나 모종도 그런대로 구할 수 있지만, 농지를 구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도 그냥 농지가 아니라 우량농지 말입니다. 우량농지와 박토의 생산량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또 그 농사를 지을 때 남부러운 그 재미가 얼마인지, 현지에서 농사를 짓고 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물론이거니와 박토를 옥토로 만드는 데는 평생의 노력이 들어갑니다. 용수공급도 좋아야 하고, 동시에 물 빠짐
짧은 동행 천지경몇 집 건너 사는 동네 아지매와 걷는 방향이 같은 날팔십이 다 된 그녀와육십을 앞둔 내가도란도란 나란히 길을 간다"새악시 참 얼굴도 곱소" 눈이 어두우셔서 낼 모레 육십인 나를이쁘다 이쁘다 하신다0자 다리로 어거정어거정 걷는 그녀허리 통증과 다리 저림에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다 한다같이 가는 십여 분의 시간 동안일생의 고달픔을 풀어 놓으시며당신처럼 되지 말고몸 아껴가며 살라고 말한다이윽고 목적지 도달그녀는 한방병원으로나는 장례식장 조리실로또 하루를 견디러 간다***** 이웃들과 별 인사도 없이 지낸다. 직장에 매인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