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미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현재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미래’와 만나게 된다. 여전히 현재를 살고 있는 나와 우리인데, 반드시 다가올 ‘미래’를 이렇게 애써 당겨 경험해야 할 만큼 그 ‘미래’가 절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세상의 흐름은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

미래를 나타내는 영어 ‘future’의 어원은 의외로 간단하다. “that is yet to be; pertaining to a time after the present”(아직 오지 않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과 연관되는)로 풀이해 놓고 있다. (온라인 어원사전, © 2001-2022 Douglas Harper)

한자 '未來'도 그저 오지 않았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면 오지 않은 시간을 이렇게 자주, 다양한 분야에서 언급하는 저변에는 그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불안감을 바탕으로 하여 준비(準備)와 나아가 선점(先占)의 욕망까지 다양한 심리적 요인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세기를 권력(국가)과 자본(시장)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시스템이라고 가정한다면, 권력과 자본이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준비’와 ‘선점’의 다양한 요건을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 파악할 수만 있다면 권력과 자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알아내고자 할 것이다. 그 사실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권력과 자본은 더욱 강력해질 것인데, 안타깝게도 아직 역사이래 다가올 일을 미리 알아낸 권력이나 자본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이유로 권력이나 자본은 고민이 깊다. 이를테면 ‘어떻게’ 또는 ‘무엇을’ 해야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미래를 엿보기 위한 방략(方略)을 짜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을 끌어모으기에 가장 효과적인 것을 찾던 중 발견한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데 권력과 자본이 거의 동의한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거대한 명사 앞에 다시 거대한 명사 ‘미래’를 놓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가정해 보는 것이다.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현재 유통되고 있는 ‘미래 교육’은 미래의 교육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방법적 고민 중 하나일 뿐이다. 현재 가용 가능한 모든 기술과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교육 현장에서 시도해보고 그 효과와 가능성, 그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술이나 방법 또는 방향이 미래에 사용될 것이라고는 확언하기 어렵다는 큰 문제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교육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교육의 방향이 마치 미래에 대한 대비 능력이나 또는 미래를 살아갈 능력인 것처럼 강조하고 심지어 마치 미래인 것처럼 현재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다. (큰 틀에서 본다면 기초적인 준비 정도는 될 수 있다.)

더욱 안타까운 문제는 미래 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현재의 교육 인프라는 여전히 현재조차도 떠받치지 못하는 허약한 구조라는 것이다. (최근 태풍 힌남로로 인한 원격 수업의 혼란) 현재의 도구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교육조차도 원활하지 못하면서 감히 미래를, 미래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인 것이다. 막연하게 현재의 상황보다 더 향상되고 원활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혹시 ‘미래’라고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서 현재가 되었듯이 현재의 모든 상황이 미래를 구축한다. 다시 말해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교육이 곧 미래 교육으로 나타날 것인데, 현재 교육에 부가된 모든 교육적 자산은 곧 미래 교육의 자산이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미래는 전혀 새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미래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기루가 아니다. 그저 현재가 돌연 퇴색한 과거가 되는 그 순간이 현재이자 동시에 미래일 뿐이다.

지금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사와 학생의 모든 교육활동 그 자체가 곧 미래를 준비하는 그 모든 것이다. 몇 개의 신기술이나 몇 마디의 새로운 교육 이론이 미래를 구축하지는 않는다. 아니 구축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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