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육과 동량

교육이 확대 재생산의 수단으로 쓰이거나 아니면 국가 체제의 유지라는 이념에 충실했던 근대산업 사회와 근대 이전의 상황에서, 교육의 목표 혹은 지향점으로 ‘동량’이라는 말만큼 멋진 말은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큰 집의 기둥이 되고 들보가 되어야 하는 누군가를 키워내는 일을 교육이라 했고 그것은 나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맹의 핵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동량, 즉 ‘기둥’이니 ‘들보’니 하는 말의 본질에는 인간을 도구로 보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엄청난 지붕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큰 집에 ‘기둥’이나 ‘들보’는 보기에는 장중해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중력과 횡 압력을 받아야 하고 그나마도 한 번 그 역할이 맡겨지면 썩거나 부서질 때까지 그 일을 맡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그런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랜 세월, 교육의 목표가 되어왔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모든 권력과 이권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고통을 더 많이 감내하고 있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상황이니 권력과 이권의 독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기둥이 되고 들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기둥이나 들보는 처음부터 크기가 다르다. 사람으로 치자면 人才들이다.(타고난 천재들) 하지만 모두가 기둥이나 들보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건축에서 기둥과 들보만 필요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건물을 유지하는 수많은 자재들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집이 되고 또 사람이 살 수 있다.

2. 교육, 그리고 人才 혹은 人材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人才와 그 나머지다. 이렇게 이분법으로 본다면 교육은 人才만 키워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人才는 거의 타고난 재능에 의존한다. 역사상 업적을 남긴 人才들이 교육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그들은 교육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가진 역량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물론 교육 제도하에서 더 쉽게 더 빨리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왕권 국가에서 인재는 국가 경영의 주축이었고 심지어 왕의 대리인으로 수많은 일을 처리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인재가 만든 방향대로 그저 움직이면 되는 상황이었다. 근대 산업국가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재는 새로운 기술의 발원지였고 그들의 역량에 따라 국가 경제가 좌우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시대다. 특별한 누군가의 능력으로 세상의 방향을 설정하고 따르는 시대가 아니고 또 아니어야 한다.

공화국에서 각 개인은 국가 자체이며, 동시에 국가는 그 개인 의지의 총화이다. 이제는 특출한 人才의 효용가치가 왕권 국가, 근대 산업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덜 하다. 물론 여전히 人才는 필요하다. 하지만 人才의 중요도는 많이 희미해지고 있다. 한 지점에서 무게를 견뎌내도록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점으로 무게를 분산하여 그 지점들의 총화로 거대한 건축물을 지탱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21세기 현재 사회 구조는 이 방향을 추구한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는 거대한 구조물을 다시 각각의 작은 구조물로 분리하고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렇게 유지되는 작은 구조물들이 모여 거대한 전체를 구성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현재의 문명 발전의 방향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동량이나 들보가 아예 없거나 아니면 모두 동량이나 들보의 역할을 수행해야 되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 그리고 정치와 교육 권력은 人才 타령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권력이 요구하는 것은 人才가 아니라 人材다. 즉 재료 혹은 도구로서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부도덕한 정치권력 하에서 부도덕한 소수의 人材들은 사회의 재앙이었고 여전히 현재도 재앙이다. 그들은 정치권력의 재료일 뿐, 어떤 의미도 없다.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그저 권력의 도구로 잘못 육성된 그들은, 우리 모두의 삶에 큰 독으로 작용한다.

3. 미래 교육의 패러다임

그래서 미래 교육은 이전의 모든 틀을 해체하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교육은 人才나 人材를 키우거나 양성하겠다는 무모함을 버려야 한다. 우리 시대의 교육은 개인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가꿀 수 있는 지혜와 방향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성장한 개인이 전체를 이루어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래 교육의 모습이어야 한다.

지금 정부의 교육부나 민선 8기의 각 시도 교육청 정책 기조에서 보이는 미래 교육은 몇 개의 신 기술(컴퓨터 운용과 관련한)을 교육과정에 적용하고 그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미래 교육으로 거창하게 포장하고 있다. 교육부를 비롯해 어떤 시도 교육청의 새 교육감 정책에도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윤리 도덕적 기초와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없거나 희미하다. 이유는 자명하다. 4년 안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표를 의식하기 때문에 성과를 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기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정책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이해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래사회에서 각 개인이 각자의 역할을 다할 수 있고 그것이 전체를 구성하는 힘이 된다는 것과 개인과 전체가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교육의 윤리적 도덕(철학)적 기초는 반드시 필요하다.

교실을, 학교를 첨단화하고 컴퓨터 신 기술(AI, 메타버스)을 적용한 교과활동을 하는 것이 미래교육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전 시대의 人材를 키우는 다른 방식일 뿐이다. 잘 활용하는 기술은 학교가 아니어도 가능하고 또 학교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곳은 너무나 많다. 학교는 왜 그것을 우리가 배우는가를 알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 미래의 문명을 이해하고 조정하며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을 사회 구성원끼리 상호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미래교육이다. 첨단 문명을 운용하고 발전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기술의 한계를 예측하고 기술에 의해 손상될지도 모를 삶의 윤리와 도덕을 강화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 미래 교육이어야 한다.

그 기초는 여전히 지식 교육이다. 초, 중등 교육을 통해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탄탄한 지식 교육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지식 교육이 이전 시대와 같이 교육의 모든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지식은, 새로운 문명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그리고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식 교육이 소홀해지는 것이 이즈음의 경향이기는 하지만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이 그 시대를 주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해서 지식 교육은 당위에 가깝다.

4.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캐나다 소설가 William Gibson은 이렇게 말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다만 골고루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 내 생각도 같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우리가 늘 말하는 그리고 생각하는 미래는 현재보다 더 좋아진 미래이거나 확연하게 달라진 미래를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이며 현재를 토대로 한다. 완전히 달라지거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미래 교육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올 문명을 준비하고 이해하며 나아가 조정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아이들에게 내가,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미 진행되는 모든 교육이 미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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