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였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몇 걸음 가다가 왼손을 허리에 대고 한 번 쭉 펴고 또 구부정한 몸으로 걸으셨다. 마을 타작마당에서 쉬고 모랭이 논으로 가는 길까지 숨을 쌕쌕거리며 걷는 모습을 기억하는 내 마음 속 사진 장면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런 꼬부랑할머니를 따라 이웃집 원평띠기 할매집에 놀러간 적 있다. 날이 저물어 할매는 저녁을 먹고 가라 했다. 며느리 평강띠기 아지매랑 같이 살았는데 그 집에는 남자 어른이 없었다. 아마 있었다면 밥을 같이 먹고 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옛 기와집에 양철을 덮은 제법 큰 집이었고 마당도 넓었고 텃밭도 있었다.

우리집이 코앞인데 저녁을 얻어 먹었다. 평강띠기 아지매는 집에서 키운 닭알로 계란찜을 해주었다. 화로에 불씨를 모아담고 작은 오가리에 계란을 풀고 휘저어 보골보골 익혔다. 화로는 웃목에 있었다. 화로를 보통 정지에 두기도 했는데 아마 추운 날이었나 보았다. 그 계란찜을 먹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우리 할머니 드리려고 부러 다시 쪘을 수도 있었다.

내가 나무도 하고 물도 긷고 부엌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쌀 씻을 때 받아놓은 뜨물로 계란찜을 한 기억이 난다. 양푼이에 담아 밥솥에 넣으면 완벽하게 익었고 솥두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을 누르고 침을 꼴깍 삼키게 했다.

두번 째로 담고 싶은 계란찜이 있는 풍경은 조계마을 이모할매집이다. 덕산에서 수곡 가는 버스가 하루에 두 대 있던 시절, 소나무가 우거진 동네인데 집은 생각나지 않는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할머니 따라 하룻밤을 자고 왔고 어둑어둑한 새벽에 아침밥을 차리는 이모할머니의 며느리 얼굴도 아련한데 시어머니 히이(언니)를 위해 계란찜을 올린 도리뱅뱅 밥상이 생각난다. 아마 우리 할매는 이모할매집에서 자고 수곡 딸네집으로 갔을 것이다. 사방골 고모집에도 닭장에 닭이 많았다. 꽤 부잣집 모양이었던 고모집에서도 계란찜을 먹었을 것이다.

사방골 고모집 가는 길도 솔숲이었다. 고모집은 솔밭 모퉁이 돌아 두번째 집이었고 대문 앞에서 앞산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 다시 울려 돌아오는 곳이었다. 서리가 내린 논두렁에서 산울림이 묻어오는 듯했다.

아침 일찍 고모가 "구구구" 닭모이 주는 소리에 잠이 깨서 솟을대문 문턱을 내려와 동네 앞길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는데 그 사이 고모는 닭장에서 꺼낸 닭알을 헤헤 풀어 쪘다.

무슨 맛이었을까?

원없이 먹을 정도는 아니었고 다만 최고로 고급진 요리였음에는 틀림없었다. 우리 입에 들어올 기회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추억 속에 먹었을 것이라는 환상만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번째 계란찜이 보글거리던 곳은 삼장면 대하마을 할머니의 또 다른 여형제 이모할머니댁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모 할매 손녀가 중학교 동기였다. 우리 할매 동생인지 언니인지 모를 이모할머니인 셈이었다.

원리교를 지나 걸어갔을까? 대하마을까지 걸어가긴 갔다. 할머니 지팡이 따라 왜 나만 갔을까? 언니들도 있었고 오빠도 있었는데 할배 할매 나들이 가실 때면 꼭 나를 데리고 갔다.

이모할머니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할머닌 돌아가시기 전에 시집간 여형제들 집을 하나씩 돌며 이별 준비를 하셨는지 2년쯤 후에 돌아가셨다. 생선도 육고기도 먹기 힘든 시절, 밥상에 내놓을 수 있는 예쁘고 맛있고 입에 호로록 넣고 음미할 수 있는 계란찜이라니.

시간을 돌려 이빠진 오가리며 뚝배기며 양푼이 허리쯤, 때로는 짭쪼름했고 때로는 밍밍했고, 지금은 너무나 흔한 계란찜 요리, 그 맛과 연노랑색을 따라 돌이켜보니 난 할머니 따라 친척집이며 이웃집에 여행을 한 것이었다.

양계장이 넘치고 대형화되고 계란을 판 채로 사먹는 시대다.

계란말이, 계란국, 만두국, 김국, 계란 비빔밥, 그냥 비빔밥 ......

넘치고 흔하고 완벽하고 질리지 않는 절대 식품, 당신에게 계란찜은 무슨 맛이었습니까?

 

※글 속에 평강띠 아지매 택호가 평가이띠, 평아이띠라고 했다.

※오가리라는 말도 항아리를 두고 하는 말인데 계란찜을 요즘 말하는 항아리에 한 것은 아니고 뚝배기처럼 생긴 작고 옴방한 그릇에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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