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춥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지수 마을에서 친척 오빠랑 언니가 우리 집에 왔다. 하룻밤을 자고 한벌 이모집(나에겐 고모)에 간다고 했다.

나무하러 가야 하는데 그날은 그 언니 오빠를 따라나섰다.

모랭이 논을 지나 삼장으로 이어진 신작로를 따라 아이 넷이 걸어갔다. 지수 고모집 오빠는 중학생이었을 것이다.

두 여동생과 함께 외가인 우리 집에 왔으니 오빠가 우리들 인솔자인 셈이었다. 신작로에 다니는 차는 버스 몇 대뿐이었을 것이다. 돌을 튕기며 다녔던 시골버스는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걸어가는 동안에는 지나가지 않았다. 보안마을을 지나 더 가면 강쪽에 코르크 공장이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자갈돌을 던지기도 했다.

오빠가 먼저 던졌고 뒤따르던 우리도 실없이 따라 했다.

보안마을을 지나 가파른 산모랭이를 돌면 대포국민학교, 교회가 나왔다. 다리를 지나 소나무숲이 나타나면 고모집에 다 온 것이었다. 연못을 지나 도착한 고모집은 옆의 집들과 똑같은 집이었다. 마당 넓은 우리집과 달라서 어? 이런 집도 있네 했다.

독가촌이라 했다.

고모집은 동네에서 구멍가게 비슷한 것을 했다. 가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 마루에 라면이며 과자 몇 개 정리해 둔 찬장이 있었다. 방이 두 개였던가? 고모부는 일찍 돌아가시고 고모는 시어머니와 아이들이랑 살았다. 모두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이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육촌들이었다.

고모는 사실 종고모였다. 우리집 가까이 살아 친고모보다 더 살갑게 살았다. 우리 어머님보다 작은 키에 덕산 장날 장에 오면 꼭 우리집에 들러 할아버지 할머니를 뵙고 가서 친숙하게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한벌 고모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제일 서럽게 울던 고모이기도 했다.

"대궐같은 집을 놔두고 .....

오빠 ....

오빠 ...”

하던 고모였다.

그 곡소리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지수 언니오빠들과 한번 동행한 이후 난 혼자서도 고모집까지 걸어왔다가 자고 가곤 했다.

고모에게는 홀시어머니가 계셨고 우린 그냥 사장어른이라 했는데 내원사에서 기거하며 공양간 일을 했다.

사장어른한테 가면 절밥과 부처님 앞에 뒀다 나온 떡이며 과일을 얻어먹을 수 있는 재미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 그 어른을 생각하니 화엄사 각황전 중수에 대한 전설이 겹쳤다. 임진왜란 전에 각황전 이름은 장육전이었고 전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숙종 때 다시 지었는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책임을 맡았던 스님이 문수보살 계시로 이른 아침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했는데 하필 공양간에서 누룽지로 연명하는 가난한 노파였다고 한다.

장육전 불사를 위해 시주를 부탁한 스님도 딱했고 노파도 딱하기는 마찬가지, 노파는 지금은 시주할 돈이 없으니 자기가 죽어 환생하면 임금님 딸로 태어나 반드시 시주를 하겠노라 하며 화엄사 계곡에 몸을 던졌다 한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어쨌든 장육전은 각황전으로 태어났다.

절집 공양간에서 일하는 할머니들을 보면 나는 화엄사 공양간 노파가 자꾸 생각났다. 먹고살기 힘든 때 사찰에서 밥하는 보살로 살거나 초부로 살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어른이 계실 때 내원사는 이제 제 이름을 찾아 덕산사이다.

어릴 때 철없이 드나들었던 고모집은 내내 평화로웠다.

성순옥 재능교육 강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내원골 깊은 골에 살다 독가촌 마을에 살게 되었다는데 그 이전 생활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동네 사람들 일부에는 장당골 화전민도 있었다. 마을에서 이슥하게 떨어져 사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살 수 있는 독가촌을 만들어 정착하게 했다. 지난 세월 지리산 깊은 골에서 숯을 만들어 덕산장에 와서 팔았다는 화전민 이야기가 전설처럼 들리던 시대였다.

고모댁에서 내원사 방향으로 더 올라가면 두 갈래길이 나온다. 왼쪽은 안내원골 오른쪽은 장당골, 절집 장명등에서 장등, 장당 지명이 나왔다고 한다. 그 깊은 골에 경상국립대학교 임업시험장이 있었고 잣나무를 심어 가꾸던 중 대학생 40여명이 이곳에 사는 화전민 집들을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다.(1964)

숯을 만들어 겨우 살아가는 화전민들 안식처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것이었다. 학생들은 임업장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고 하지만 행정당국이 적법한 절차를 밟아 이주시켜야 하는데 학생들 결기가 더 앞서 역사에 두고두고 악행으로 남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산이 깊고, 깊은 산에서 연명하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이 살고 있을 터, 지리산 화전민에 얽힌 고달픈 이야기도 이 골에 남아 있다.

독가촌은 실제로 여러 군데 있었다. 중학교 때 덕교마을에서 온 친구도 독가촌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지리산 험지에 행정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사람들을 보다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필요했으리라. 이주민 모두가 화전민은 아니지만 삶이 그렇게 유복하진 않았을 것이다.

고모집과 똑같이 생긴 집 사이 좁고 어두운 틈 사이로 경계가 생겼지만 우린 틈을 비집고 다녔고 하룻밤 이틀밤 자면서 내원사(덕산사)까지 걸어가서 부처님 전에서 나온 떡까지 얻어먹고 즐겁게 놀았다. 어두운 전깃불 아래서 흑백텔레비전으로 영화도 봤다. 사실 우리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영화를 봤다. 그 때 본 영화가 엘시드였다. 소피아 로렌을 처음 알던 때, 아마 6학년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수에서 온 어린 방문객 덕분에 대포마을은 내 유년에 꿈같은 도보여행지가 되었다.

고모집 동네 사람들 평범한 일상과 화전민과 빨치산이 얽히어 사연도 절절한 동네, 고모도 돌아가셨고 육촌 형제들은 남이나 다름없이 살아온 세월이라 거의 잊혀진 관계지만, 아직도 거기로 가는 길이 있고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제 이름 찾은 절집도 있고 밤톨같은 후손을 반기는 소박한 옛집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그때 같이 고모집에 갔던 언니랑 통화를 했다. 우린 퍼즐 맞추듯 그날 이야기를 했고 어린 시절 동행에 대한 기억을 했다.

"그게 니였나? 외가집에 와서 이모집 간다고 걸어갔는데. 강으로 돌도 던지고."

"그날 오빠랑 같이 온 사람이 언니였어요?"

우린 45년 정도 뒤로 시간을 돌려 모랭이 논길에서 한벌까지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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