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생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족 박문혁 동무는 훈춘 출신이었다.

1990년 당시 산동성 제남에서 직장을 다녔고 동갑내기 아내는 중국국제여행사 가이드였다. 중국 여행 취재를 위해 지인이 연결해줬는데 가이드비가 경비를 초과해서 취소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위해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적산 법화원 장보고 사당, 곡부 공자 사당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무모한 도전이었다. 중국 현지 사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덤빈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바퀴가 달아날 것 같은 버스를 타고 세 시간 넘게 갔는데 박문혁은 통역을 해주며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내가 연변까지 간다고 하니까 자기집 주소를 주며 찾아가라고 했다. 연길에 숙소를 정하고 용정, 화룡, 도문 일대를 돌며 발해 유적지, 청산리, 전투지 용정 우물 두만강변을 돌아보고 훈춘 가는 버스를 탔다.

박문혁 본가는 동생, 부모 조부모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11월 간도 지역은 온 하늘이 갈색 혹은 재색이었다. 땅은 질펀거렸고 나무라고는 보이지 않는 벌판, 아니 산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박문혁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에 집이 또 있는 겹집이었다. 말로만 듣던 북쪽지방 가옥이었다. 나무를 쌓아두는 곳, 가마솥 아궁이 방 안에 부뚜막 같은 것을 만들어 따뜻하게 불을 넣었다. 문혁 할머니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문혁 부모들은 경상도가 고향이라 했다. 연변 말에 경상도 말이 섞였다. 어머니는 문화원 같은 곳에서 일한다고 했다. 가족들과 점심을 먹고 다른 농가에도 갔다. 그곳에도 할머니가 계셨다. 고향이 평안도라 했다. 고향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고향이 북한인 사람들 삶은 대부분 녹록지 않았다.

문혁 집은 그래도 다복했다. 부모가 모두 일을 했고 한족과 달리 자녀도 둘 이상 낳아도 되었다. 당시 중국 출산 규정은 엄격했다. 한 가정 한 자녀만 낳게 되어 있었다. 운남성 깊은 산골 사람들은 타지에서 애를 낳아 등록도 안하고 산다는 말이 있었다.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 때문이라 했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은 그래도 한 세대를 지나서 그런지 다들 교육도 받고 나름 교양을 갖추고 살았다. 문혁 일가는 남한에서 왔다고 극진히 대해 주었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이후 일제는 독립군에게 패한 앙갚음으로 조선족들을 학살했다. 마적단을 매수해 부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해 그것을 빌미로 조선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다. 훈춘사건, 해란강 학살, 간도 대학살이라고 하는 끔찍하고 무도한 살륙, 북간도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훈춘을 여정지로 삼았다. 거기 사는 조선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떻게 살아냈을까 보고 싶었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청조시대말부터 뿌리내리고 산 힘으로 터를 일구고 광복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 전역에 110만이라는 소수민족 인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혁 일가도 그런 가정 중 하나였다.

산동성에서 북경, 장춘, 하얼빈, 흑하까지 가는 내내 조선족 연결고리로 보부상처럼 여행을 했다. 아무런 계산도 없이 그저 동포라는 이유로 재워주고 밥을 먹여주고 차를 내주고 안내해 주었다. 그들에게 두고두고 빚이 되었다.

문혁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 살아계실 때 나이만큼 보였다.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떠나는 시간,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눈물을 글썽였다.

스물다섯 나에게 "아메이"야 라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도 삼십년 넘게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느낌상 색시야, 처자야 정도로만 알면 되었으니까.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검색을 해봤다.

아메이(阿妹),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은 소저(小弟), 소제라고 불렀다. 글씨를 써주거나 편지를 보낼 때도 그렇게 썼다.

1990년 11월 북경에서 쌍발기라는 것을 타고 연길로 갔다. 좌석 옆에서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난 이러다 떨어져 죽는 것 아닐까 하며 눈을 꼭 감고 이를 앙다물고 견뎠다.

이런 비행기라니.

그리고 중간에 심양에서 중간 급유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간 훈춘이었다.

"이름을 왜 문혁이라 했어?"

"문화대혁명기에 태어나서 그렇게 지었어. 아마 내 또래 남자들 이름 거의 같을 거야."

짐작은 했지만 진짜 문혁을 만나다니 했다. 중국 역사 현장마다 문혁 때 입은 상처가 있었다. 깨진 비석 붉은 글귀 흔적 "지식분자들 노동 3년 하기."

문혁 부모들도 의무적으로 농사짓는 노동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와 인민의 피를 빨아먹는 지식분자들을 대거 숙청하던 시대였다.

집안 항렬에 상관없는 이름 문혁.

그들 국적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를 그린 중국이었다.

겹집문을 열고 나와야 오후 햇살을 조금 쬘 수 있는 북방마을.

문혁 할머니는 비녀를 지른 낭게머리와 털스웨터를 동여매고 "아메이야 또 오니라." 하며 힘겹게 손을 흔들었다.

일흔 중반 아매가 스물다섯 아메이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풍경을 뒤로 하고 십년 후에 꼭 뵈러 오겠노라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32년이 흘렀다. 문혁 할머니는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닐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곳인데 시간과 마음이 쉽지 않았다. 일 반 여행 반 목적으로 간 것이라 의무감이 사라져서 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배려, 어린 시절 보따리 장수 지나가면 하룻밤 재워주었던 우리 할머니 세대 인정이 그들 조선족에게도 있었다. 청산리 전투지나 두만강 유역 도문에 갈 때도 길림신문사에서 차량까지 지원해 주었고 한 치과의사는 저녁식사에까지 초대해 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연결고리로 이어진 여행이었고 어쨌든 나는 흑하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나와 같은 성씨를 가진 그 치과의사는 임수경 달력 하나를 돌돌 말아주기도 했다. 서울까지 무사히 들고 왔지만 결혼하면서 진주로 오는 바람에 오빠집에 두고 온 게 후회가 되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역사적인 화보가 되었을 텐데 아쉬웠다.

한 달 동안 중국 대륙 3할 이상은 다녔다. 조선족들이 점점이 박혀 살아낸 곳에서 그들이 내민 순수한 인정이 문혁 할머니와 가족들 삶처럼 포근했다. 덕분에 나는 서간도, 북간도 만주 전 영역까지 선한 마음으로 중국을 기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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