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건제복과 만장과 꽃상여와 소나무 냄새와 돼지 멱따는 소리......

한 생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살던 집 방이며 청, 정짓간, 뒷간, 헛간, 싸리울, 감나무 아래 평상, 고방, 소마굿간, 남새밭, 장꼬방, 새미가 뒷물하던 뒤안, 목깐통까지 다 돌아보는 시간, 이틀 아니면 사흘 산 사람들 옷깃을 잡으며 이승에서 머무는 마지막 여정. 그 사이 산 사람들이 하는 일을 그려본다.

청소년 시절 기억이다.

1900년대 태어난 우리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우리집 마당은 공예대전을 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대목수 대내양반이 송판을 꺼내 관을 짜고 내동띠기, 대내띠기 아지매 그리고 뒷집 할머니까지 와서 수의를 짓는다고 앉았고 밤새 동네 남자들이 모여 상여꽃을 만들었다. 정지에서, 정지 앞마당에서 손이 빠른 동네 아지매들이 전을 부치고 떡을 만들고 돼지 마구에서 돼지를 잡아 목을 따는데, 그 소리가 반나절 동안 감나무를 흔들었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난생 처음 들었다. 집채만한 돼지 네 다리를 꽁꽁 묶고 모로 눕혀 축 늘어진 돼지 목을 칼로 긋는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듯 피가 주루루 내렸다. 목에서 흐른 피는 고무다라이에 고였다. 피가 다 받칠 즈음 돼지는 마지막 숨을 쉬지도 못하고 늘어졌다.

나는 검붉은 피를 어디에 버릴까 주시하며 사랑채 댓돌에 앉아 기다렸다. 저걸 강에다 버릴까? 산에 갖다 버릴까? 나중에 알고보니 씻어낸 돼지 창자에 피를 넣어 끓이는 것이었다. 일명 토종 순대. 커다란 사구에 미리 양념을 해서 생생한 돼지피를 섞어 창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다른 내장과 함께 삶아내는 것이었다.

아랫채 아궁이에 앉아 불을 조절하는 사람도 동네 아저씨였다. 그렇게 세세히 동네 남자들은 능수능란하게 각자 맡은 분야를 잘도 해내었다. 고기를 발라내는 사람, 창자를 씻어내는 사람, 대나무 대롱으로 창자를 끼워 피를 넣는 사람, 돼지머리를 삶는 사람. 수십년 익숙하게 해온 솜씨인 양 마을에 초상이 나면 그렇게 분업을 해서 계군 역할을 해냈다. 장례식 준비를 하는 최고 장면은 일필휘지 만장을 쓰는 사람이었다. 동네에서 한문을 배웠다는 사람이 썼는데 붉은색 흰색 노란색 천에 먹물을 묻혀 휘리릭, 화장품 가루 같은 분통을 열어 무엇을 섞어 쓰는지 허옇게 글씨가 살아나는 마술 같은 작업이었다. 가루분 같은 것은 금분 은분이라 했다. 주사를 쓰기도 했는데 독성이 강해서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했다. 아마 비싼 금분 은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화장품 통에서 꺼낸 가루였다.

멍석을 깔고 긴 만장 여러 장을 다 쓰고 나면 그의 소임은 끝났다. 할머니 할아버지 만장은 은환아재가 썼다. 동네에서 한문도 좀 알고 글씨도 좀 쓰셨기 때문이다. 그 분은 아직 살아계신다. 우리 아버진 가숙양반이라 불렀다. 가숙띠기 아지매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는 독새풀 난 듯 마구 대하더니 생을 다할 때에서야 산 사람들이 향연을 하듯 하는 일이라니.

어릴 적 내가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 삶을 돌이켜 보건대 반쯤은 죽음을 위해 준비하고 사는 듯 했다.

소나무를 베어 송판을 미리 만들고 삼베를 짜서 수의 지을 천을 농바닥에 쟁여두고 또 수십년을 살았고 살아서 고운 옷도 제대로 못해 입으면서 수의로 입을 천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삼베 수의를 입은 할머니 체온은 몇 도였을까. 사람들이 문상을 올 때마다 상주들은 곡을했다. 작은 아버지는 가끔 온기 없는 할머니 얼굴을 만져보기도 했다. 입관하기 전이었다. 일상이 특별한 풍경으로 바뀌는 사흘이 우리집 마당에서, 방방에서 박물관 한켠처럼 각인되었다.

할아버지가 마련해놓은 송판은 소마굿간 옆 처마 밑에 몇년 동안 쌓여 있었다. 우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다. 타작한 먼지가 쌓여도 눈바람이 날려 쌓여도 썩지도 않은 나무 판데기라고 여겼다. 할머니가 먼저 썼고 할아버지 아버지 순으로 송판은 하나씩 낮아졌다.

할머니 관을 상여에 태우고 굴건제복을 한 상주들이 대나무 작대기를 짚고 아이고 아이고 하며 상여 뒤를 따라가는 것도, 상여소리를 내는 소리꾼과 상두꾼 소리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슬픔보다 슬픔에 대한 의식을 더 기억했다. 아니, 그때는 슬픔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고모들이 통곡하는 목소리에 내 마음도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이 제 일 다 제쳐두고 맡은 일을 하는 모습, 심지어 기술자 영역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솜씨는 모두 마을공동체의 힘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예술이었다. 혼례를 능가하는 장례 예술이었다. 단 이틀 만에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손빠름까지 갖춘 완결. 갖춰진 상품으로도 헛점이 많은 요즘 장례의식에 비해 뒤지지 않을 만큼 다부진 손놀림이었다.

상가집 일을 치르는 마을 사람들 정성을 잊을 수 없지만 망자가 생을 시작하는 순간과 살아내는 과정에서도 더 절절한 사랑과 애틋함과 예의가 깊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딸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살아야 했던 여인, 아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중하면서 잔치집 같은 장례의식과 대비되는 풍경을 기억하니 새삼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할매, 생전에 꼬부랑 허리에 작대기 짚고, 열재(예치)마을, 조계마을, 대가이(다간)마을, 원촌할매 집 갈 때 날 데리고 가 조서 참말로 고맙데이.

화로에 보글보글 끓는 다갈(계란)찜도 얻어무 보고. 그때 한 시절이라도 같이 댕기조서 얼매나 고마운지. 꽃가마 타고 어여어여 가시는 모습 꿈에도 잊지 못합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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