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여름 방학이 되면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소 풀 멕이기, 꼴베기, 썩힌 보릿단 작두질하는데 거들기, 논에 피 빼기, 물 긷기, 잔디씨 뽑기, 퇴비 만들기, 방학 숙제하기, 일요일마다 조기청소하기 등등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감잎 떨어진 것 쓸어서 헛간에 담아내고 물긷고, 매미소리 시끄러운 한낮에는 마루에 소반을 끼고 앉아 방학숙제하다가 동네 아이들이 소고삐 잡고 한둘 지나면 마굿간에 소를 몰고 갱변에 갔다.

갱변에 이르는 길에 벼논을 잘 지나야 했다. 소고삐를 느슨하게 하다 잘못하면 동작빠른 소 혀끝이 어느새 잘 크고 있는 나락을 쓰윽 훑어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소는 겅중겅중 신작로를 지나 매미소리 시끄러운 버드나무 미루나무 아래서 머뭇거리다 갱변에 들어서면 뜨거운 자갈 사이로 난 풀들을 착착 뜯어먹으며 오후를 즐겼다.

갱변 끝에 보가 있어 소들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돌아서 내려오고 또 올라가고 서너 번 반복하면 노을이 진다. 그 사이 우린 콩돌도 하고 멱도 감고 잔디씨도 받고, 가끔 소멕이하는 경계 보안 마을 아이들과 이유모를 돌팔매질도 했다. 영역 다툼같은 것이었으리라.

배가 볼록해진 소를 몰고 집에 오면 아버지는 또 딩겨를 풀은 물을 한 사구 만들어 구시에 부어 주었다. 파리떼 모기떼 끓는 마굿간 앞 마당에 평상을 놓고 모깃불을 지피는 여름밤. 은하수도 보고 별도 보고 제법 평화로운 풍경이었으나 낮에 물놀이에 지쳐 귀도 아프고 멱감기하느라 팔을 하도 휘저어 온 몸이 욱씬거렸다.

평상에서 별 보며 뒹굴다 언제 청으로 방으로 잠결에 올라갔는지도 모르게 여름밤이 지났고 또 아침이 왔고 해가 뜨면 반복되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뉴월에 쟁여둔 보릿단이 헛간에서 발효될 즈음 아버진 식구들을 모아 작두질을 했다. 김이 폴폴나는 보릿단을 쇠스랑으로 찍어 내리면 어머닌 작두에 보릿단을 먹였다. 스윽 잘리는 작두날에 습기가 묻은 보릿단 줄기가 잘려 쌓였다. 잘린 보릿단 거름을 다시 헛간에 쟁여두고 아버진 바지게에 담아 논밭 거름으로 썼다. 내 생애 최악의 가사노동이었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퇴비는 산에서 벤 풀이어야 했다. 방학이 끝나면 새끼로 묶어 가져가야 했다. 전교생이 모아간 퇴비는 학교에서 모으긴 했는데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다. 퇴비값은 받은 바가 없다. 10살 이후 몇번 퇴비를 가져간 것 같은데 그것으로 산림녹화운동을 했을까? 옥토 만들기 사업을 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잔디씨를 뽑아 봉투에 담아내긴 했는데 그것 또한 어찌어찌 썼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시골 학교 한 반 학생이 70여명일 때 세 학급이면 210여 명, 3학년 이상 전교생이 모아간 잔디씨는 다 어디로 갔을까?

하긴 대통령 한 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작동하던 시절이라 "어디 가보니까 잔디공원이 참 좋더군" 하니까 전국 사당이고 공원이고 잔디를 심고 밟지도 못하게 했으니 오죽했으랴. 잔디고 퇴비고 그에 대한 품삯은 늘 영이었다. 지금 세상이었으면 학부모들은 고분고분했을까?

아, 참으로 고분고분했던 시대였다.

그래도 방학 동안 숙제를 잘해 가면 상을 주었다. 독후감 쓰기, 그림 그리기, 붓글씨, 만들기 등등 등사판으로 찍은 갱지에 빼곡하게 쓴 방학 숙제 목록을 다해 가려고 애를 썼다. 슬기로운 방학생활에 대한 보상이었다.

상수도가 없었던 시절 아침저녁으로 물긷는 일은 필수였다. 차가운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퍼올려 물동이에 이고 나르는 일은 열네살까지 했다. 동네 사람들이 힘을 모아 상수도 놓는 노역에 거들었고 한 집에 한 명 괭이나 삽을 들고 나오라길래 아버지 대신 가서 상수도관이 지나는 길을 파는데 나갔다. 동네 아지매들 음담패설이 흙파는 소리와 함께 난무하던 기괴한 시절이기도 했다. 협동 단결 근면 자주라는 표어가 마을 담벼락이나 농협창고 벽에 붙어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때도 품삯은 영이었다. 대신 우린 상수도를 가졌다.

지금은 모든 토목공사를 입찰해서 한다. 공정한 입찰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돈을 번다. 일요일 아침마다 조기청소도 해야 했다. 애향반장은 일지를 가지고 출석부 확인도 했다. 그 짓을 고1 때까지 했다니 내 기억력이 참으로 징하다. 그런 것을 기억하다니.

여름방학 한 달 열흘은 풋밤이 나올 무렵 끝났다. 그때는 소를 몰고 산으로 갔다. 밤나무 아래서 풋밤을 까먹는 재미도 있지만 물이 가을을 머금어서 갱변에서 멱감는 일은 못하기 때문이었다. 풋밤 보늬를 손톱으로 밀어 까서 먹어보라고 주던 윗마을 갱순(아마 경순이었을 것이다) 언니 얼굴이 가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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