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소죽 다라이 들고 가시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 그날 이후 지팡이 두 개를 짚고 겨우 마당을 거닐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예 걷지를 못하셨다. 사랑채 반쪽짜리 방에서 앉았다, 누웠다 3년을 그렇게 보내셨다. 중학생이던 나는 반쪽짜리 옆방에 공부방을 마련하고 할아버지 수발을 들었다. 흙벽에 붙은 황토가루가 떨어지고 쥐가 갈그락 또는 갉그락, 빈대가 살갗에 달라붙고, 늙은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소리에 껌쩍껌쩍 놀래는 양철지붕을 머리에 두고 내 청소년 시절 3년은 그렇게 할아버지 숨소리 멎지 않은 공간에서 흘렀다. 벽사이에 구멍을 뚫어 전구를 반쯤 걸친 어둑어둑한 방, 할아버진 그것도 눈부시다고 어서 불을 꺼라 했다. 그런 방에서 시험공부를 했고 할아버지께 국어책도 읽어드렸다.

방정환 수필 "어린이 예찬", 이양하 수필 "나무"가 교과서에 실렸던 시절이었다.

아침 저녁에는 요강을 비우고 용변 처리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는 비료포대를 가져오라 하더니 엉덩이 밑에 깔아놓으라고 했다.

힘도 없고 뼈도 튼튼하지 못한 마른 나뭇가지같은 할아버지 두 허벅지를 들어 비료포대를 깔았다. 변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는 변을 보지도 못했다. 겨우 힘을 주고 나서 다 됐다 하시면 난 비료포대를 치웠다. 염소똥만한 것이 두어 개 겨우 나와 있을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변 치우는 것을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으셨다. 특히 며느리에게는.

처음엔 느낌이 이상했지만 자꾸 하다 보니 아무렇지 않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일년을 이렇게 했다. 온 힘을 다해 변을 봐도 할아버지 몸속에 있는 대장 끝에는 염소똥만 가득해서 한두알 콩콩 나오는 것도 신기하게 여겼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사랑채 앞 헛간 거름 속에 변을 버리고 포대를 씻었다. 변기도 기저귀도 없었던 시절이라 그렇게 쓰고 씻고 바꾸고 그랬다.

흔들리는 코스모스 길에서 사진도 찍고 빵집에서 빵도 사먹고 친구들과 팝송이며 가요 테이프를 돌리며 놀고 싶던 사춘기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겨우 청소년 표시를 낸 것 같다.

가족들은 내가 할아버지 변까지 받아내는 줄 몰랐다. 요강만 비우는 줄 알았다.

변비가 너무 심할 때는 공의나 후생당 약방 아저씨가 와서 관장을 했다.

사람의 몸이 살아 있을 때 참으로 대견하다 여겼다. 입으로 들어간 쾌감이 몸속을 다 도는 동안 며칠의 고통으로 엉켜 있다가 뚫리는 순간이 내 것인 양 그렇다니. 남자가 아닌 할아버지 그것을 일찌기 봐 버린 무덤덤함이 내 사춘기를 덮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그때 그 순간 다른 형제가 아닌 나여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딩 이전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바리깡이다. 이발소를 가지 않았던 할아버지 머리밀기도 내 담당이었다. 겨울 지나 봄이 올 무렵 사랑채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할아버지는 축담에 걸터앉아 햇살 앞에 몸을 놓았다. 다우다보따리로 목을 두르고 기름칠한 바리깡으로 돼지털 같은 머리를 밀었다. 할아버지 머리카락이 뻣뻣해서 돼지털 같았다. 내 머리카락도 좀 그렇다. 바리깡이 잘 밀리면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다 깎으면 내복을 벗겨 이를 잡았다. 겨드랑이 솔기에 이가 제일 많았다. 손톱으로 토독 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할배 피 많이 빨아뭇는갑다. 뽀도독 소리가 나네예.“

하긴 이순신 장군도 틈만 나면 이를 잡았다고 했다. 목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 머리에도 이가 수두룩했다. 마을회관에 무쇠 목간통이 생기기 전까지 우린 수시로 이를 잡았다. 마른 나무껍질 같은 가죽만 뼈에 붙이고 할아버지 팔꿈치며 엉덩이뼈까지 허연 못이 배겼지만 욕창은 걸리지 않았다.

을사늑약 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보내고 좌우익 격동기를 거친 할아버지는 평생 천하장사 농사꾼으로 살다 가셨다. 육이오 전에 큰아들 부부를 잃은 통한 외에는 무난하게 살아오신 듯했다.

좌익을 했던 큰아버지는 총살을 당했고 큰아버지를 잃은 큰어머니는 "이 놈들아 내도 직이라 " 하고 악다구니를 썼다고 또 총질을 했다 한다. 그럴 수도 있나? 벌거벗긴 시신을 바지게에 지고 온 할아버지 인생도 그때 벌거벗겨졌을 것이다. 동네 청년들 아무나 잡아두고 좌익분자 한 명 밀고하면 풀어주는 악마같은 시대였다.

그런 시대와 전쟁, 피난살이, 다시 평화로운 농부의 삶. 마지막엔 영원한 안식.

내 청소년기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6년 정도뿐이다. 할아버지가 건강할 때는 여름방학 때 쌀자루와 감자 자루를 버스에 싣고 부산에 가는 일이었다. 덕산에서 비포장도로를 달리다가 진주에 도착해서 합동주차장에 좀 쉬었다가 부산으로 가는 직행버스였다. 부산에 도착하면 택시를 타고 대연동 고개에서 내렸다. 감자농사 지은 것을 작은 아들네 집에 가져가는 일이었다. 난 딱 한번 따라나섰다. 대연동 작은아버지 집에 처음 갔던 흑백 추억이었다. 할아버진 그때 건강하셨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난 여러 형제 중에 유일하게 부산 삼촌 집을 방문한 행운을 얻은 것이었다.

할아버지 따라서 갔던 부산행에서 빨간 운동화와 기계 주름이 잡힌 하늘색 원피스를 얻어 입은 것도 그때였다. 막내 삼촌이 사준 선물이었다. 할아버지 덕분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목욕탕을 갔다.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김이 서린 목욕탕 속에서 누군가 내 심장을 누르는 것 같았다. 그 뒤 나는 대중목욕탕을 갈 때마다 큰 결심이나 체력보강을 하고 가야 했다. 할아버지 덕분에 난 도시체험도 그렇게 했다. 소죽 다라이 사고는 아마 그 이후에 난 듯하다. 지금처럼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생각을 왜 못했을까. 물리치료도 받고 했어야 했는데 그냥 그렇게 견딘 모양이었다. 노화와 병마가 같이 겹쳐 할아버지는 사랑채에 누운 채로 계시다가 할머니 빈소를 일 년 지켜보시고 빈소 철거한 지 석 달 후에 돌아가셨다.

사월 초파일이었다. 크르릉! 마지막 숨소리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윗채 안방에서 숨을 거뒀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모든 것이 무채색 흑백 사진이었다. 아버지 이야기는 어머니께 시대를 헤아려 들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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