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남향 양철 지붕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엉을 엮어 얹은 초가였고 두 칸짜리 방과 고방과 소마구간이 있는 아래채도 양철 지붕이었다. 새마을운동으로 후다닥 시멘트 칠을 한 담벼락 안에 백년쯤 되었을 감나무가 양 옆에 있어 바람부는 날에는 감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꿈에서 깨곤 했다. 감이 떨어지고 혹은 감을 다 따고 난 쌀쌀한 새벽, 아버진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장대를 걸고 삼베천인지 광목천인지로 막을 쳤다. 내 기억엔 아침이지만 아마 전날 타작할 준비를 다 해놓았을 것이다.

홀깨(발로 밟는 탈곡기)를 대고 왼쪽에 볏단을 미리 갖다 놓고 서리 맞지 않게 잘 덮어뒀다가 새벽에 벗겨 타작했을 것이다.

해가 뜨기 전에 타작을 다 끝내야 했다. 처마끝 서까래 끝에 전깃줄을 이어 마당을 가로질러 불을 밝히고 시렁 아래에도 광목천을 드리웠다. 타작할 때 날리는 티끄래이(벼까끄라기)가 마루에 쌓이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온 식구들이 볏단을 나르고 홀깨 옆에 착착 놓았다. 아버지는 홀깨 발 주조종사였고 우리가 1차로 떨구어낸 볏단을 건네면 받아서 앞뒤로 뒤집어 야무지게 낟알을 떨구어내었다. 홀깨질하는 두 사람 발힘이 빠지면 한 사람이 더 발을 얹어 힘을 보탰다.

알곡이 털린 짚단을 공중에 휘릭 던져주면 누가 또 쟁여 짚동을 만들었다. 소여물이 될 것이었다.

묵직한 볏단이 홀깨에 닿는 순간 과릉과릉했다 와롱와롱했다 스스슥했다 소리가 달랐다. 홀깨날에 떨어져내린 알곡들은 광목천에 부딪쳐 앞에 수북히 쌓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당그래이(고무래)로 끌어내고 정리하는 담당이었다. 멍석에 낟알이 쌓이고 볏단이 줄어드는 순간 해가 떴다. 마루에 쳐놓은 광목천을 거두고 부연 먼지를 쓸어내렸다.

솔기에 박혀 있는 낟알까지 탈탈 털어 아침을 맞았다. 아침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런 가을 의식을 두세번 하고 나면 추운 겨울이 온 기억밖에.

타작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마당에는 덕석 (멍석) 다섯 개가 햇빛 속에 드러누워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로 다니던 우리들 발길은 조심조심 덕석을 피해 다녔고 해가 지면 낟알을 덕석 가운데로 몰아 덮고 또 마당에서 밤을 새워 두었다.

달밤에 볼록하게 누운 덕석이 찬 서리를 맞아도 이튿날 아침 해가 뜨면 또 바싹 마르고 그랬다.

어른들은 낮동안 가래질로 왔다갔다 하마 날이 궂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가을걷이 막바지에 정성을 다했다.

보리 까끄라기보다 덜하지만 타작하고 난 뒤 아무리 찌끄레기를 떨구어내고 씻어도 몇날 며칠 등이 가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많던 티끌들을 날려보내고 차롬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알곡이라니.

비록 무채와 잎이 시퍼런 배추잎 김치를 먹는 끼니였지만 하얀 쌀밥을 먹지 않았는가. 설탕으로 비길 수 없는 달달함이었다.

우리가 학교에 피해 있는 동안 어른들은 덕석 위를 왔다갔다 하며 우케 너는 의식을 거룩하게 했음에 그 밥맛이 달달했을지도 모르겠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얼마전 진주시 이반성면에서 "와롱이축제"를 한다는 포스터를 봤다.

와롱이?

어라 이건 홀깨 소리인데 하며 눈여겨 봤다. 올해 세번째라고 한다.

축제이름에 끌려 꼭 가보고 싶었지만 평일이고 내 동선에서 멀어 가지 못했다. 내 귀에는 과릉과릉이었는데 와롱와롱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웃었다. 잊혀진 것들이 그래서 살아났다.

수천만원 하는 트랙터 한 대로 모심기에서 수확까지 한번에 끝내는 시대라 이런 홀깨같은 탈곡기가 제 구실을 하지는 못했지만 농사짓는 역사 속에 있었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삶이 녹아있는 소릿말이기도 했다. 그런 와롱이 소리를 재현하는 행사도 희귀한 체험이 되는 시대구나 했다.

한 세상은 잊어버리고 한 세상은 기억하고 세월이 더 지나면 기억한 것 반만큼 또 잊혀지겠지만 반가운 말이요, 소리였다.

감따기가 먼저였는지 타작하는 일이 먼저였는지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남향집 하늘에서 보이는 페가수스와 어쩌다 새벽녘 변소길에 본 초승달이 서쪽 하늘에 걸려 있을 때도 있었고 밤이나 새벽이나 오들오들 몸이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던 가을.

손가락도 잘 펴지지 않는 추위 속에서 우린 분명 가실노동을 하였다.

과릉과릉 와릉와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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