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겨울 삽화 1 - 조기체조

1977년 앞뒤 해 덕산국민학교 학생이었다. 12월 24일 정도면 겨울방학에 들어갔는데 학교에서 반강제적으로 겨울방학 조기체조를 시켰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학교 운동장 한 바퀴 돌고 도장을 받아가는 일이었다. 날짜가 적힌 종이를 미리 나눠 주었는데 종이가 찢어질까 두꺼운 마닐라지로 덧대붙여 목에 걸고 집을 나서야 했다.

학교 갈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옷을 껴입고 할머니 목도리를 두르고 마당을 나서면 초저녁 하늘에 있던 삼태성이 어디로 갔는지 이름 모를 별 몇 개 반짝이는 것 보고 마을 길을 나섰다.

뛰어서 가야 운동이 되는데 학교에서 뛰어오란 말이 없어서 우린 총총 걸어갔다. 연화마을 불꺼진 집들을 지나 원리교 다리를 지나면 학교였다.

몸을 웅크리고 학교 운동장을 돌았다. 그러면 당직을 섰던 선생님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다시 돌아오는 길은 또 얼마나 추웠던지 손도 발도 얼굴도 내 것이 아닌 듯했다.

다리 입구에서 다리 중간까지 간 언니 뒷모습을 보고 '내가 저만치만 더 갔으모 얼마나 좋을까' 하며 부러워했다. 그렇게 긴 다리가 아니었는데 어릴 때는 정말 길어 보였다. 거기에 신발은 얇은 베신, 운 좋으면 할머니 털신이었다. 할머니 털스웨터를 서로 입고 가려고 전날 밤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날짜마다 도장이 꾹꾹 눌린 "표쪼가리"를 개학하면 검사 맡아야 했다.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했을까? 우리만 미련하게 그러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생각하니 학교 가까이 있는 학생들만 시킨 듯했다.

지금 그 시절 선생님들을 뵈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시켰냐고 묻고 싶다.

손발이 얼어 동상이 걸리고 어린 학생들을 그런 겨울새벽에 깨워 조기체조라는 것을 시킨 저의를.

그래서 우린 굳건해졌을까? 군인처럼 훈련시키고 싶었던 시절에 실적보고용 교육행태가 아니었을까?

"얘들아, 밤 하늘에 별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샛별이 사위고 해가 뜨는 모습을 같이 보지 않겠니?" 하는 마음으로 불러내었다면 또 달랐을까.

그런 선생님이었다면 아마 "반미친개이" 소리 들었겠지만.

조기체조 확인도장은 국민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받으러갈 필요가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조기청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마을회관에 모여 골목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참석 여부는 애향반장이 일지에 기록하였다. 그것은 사계절 다 했다.

"니, 안 나왔제?"

"아이다, 난 우리 집 앞에 씰고 갔다."

"그래도 출석 확인은 해야 될 것 아이가?"

이런 시비로 동네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빗자루 들고 마을 청소하는 일은 엄동에 학교 운동장 도는 일보다 수월했다. 말띠, 양띠, 원숭이띠 조무래기들과 가끔 뱀띠, 용띠 동네 힝아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마을 애향단은 고등학교 3학년 전에 없어졌다. 동네 부잣집 아이 한두 명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1977년 앞뒤 겨울방학 새벽은 내 손에, 발에 동상과 함께 얼어버렸다.

 

겨울 삽화 2 - 애기장터

"저 꼭대기 밑에 굴러 내려온 돌밭은 뭐꼬?"

"어, 저거 애기장터라더라."

"애기장터?"

"아있나, 얼라가 죽으모 단지에 넣어서 저런 돌무덤을 만든다 안쿠나"

"그라모 저런기 다 얼라들 묻은 데란 말이가"

겨울방학 때마다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전날 숫돌에 갈아놓은 조선낫과 새끼줄을 갈무리해서 숨가쁘게 언덕길을 넘어 반나절 철쭉대도 베고 싸릿대도 베고 했다.

몇 줌 쌓이면 새끼줄에 쟁여 이고 왔는데 나무하다 허리 한번 펼 때마다 능선 위로 바다처럼 펼친 하늘색에 감탄하곤 했다. 동네 오빠들은 더 깊고 먼 곳에 들어가서 단단한 나무를 베어 지게에 지고 왔는데 모퉁이마다 쉴 곳을 정해 나뭇짐을 뉘여놓고 마른 삐삐밭에서 쉬기도 했다.

그런 산 풍경 속에 띄엄띄엄 있는 돌밭을 볼 때마다 우린 그게 다 애기장터라고 생각했다. 쉬이 갈 수 없는 가파른 곳이어서 거기까지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집집마다 어린아이 한 명쯤 잃어버린 슬픔이 있길래 애기장터가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산양인지 무슨 짐승인지 두 마리가 이쪽저쪽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아기들 영혼이 살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이라 여겼다. 우리가 나무를 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아기 시신을 안고 묻으러 간 엄마들은 어떻게 저기까지 갔을까 의문이었다.

세월이 지나서야 그건 애기장터가 아니라 산사태로 돌이 굴러 쌓인 것임을 알았다.

홍역이나 열병, 경기, 영양실조로 죽은 동네 아이들 무덤은 어느 나무 밑이거나 봉분도 없는 "매장" 그 자체였는데 산에 이리저리 박힌 돌덩이도 애기장터라고 여겼으니 우린 늘 전설 하나씩 안고 있었던 것이다.

내 동생도 이웃 야산에 묻혔다. 가족들이 슬퍼하고 마음 쓰려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통곡하던 그 목소리만 기억할 뿐이다.

무명천에 둘둘 말아 묻은 기억. 항아리에 넣지도 않았고 봉분도 없었다. 세월이 아기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이 글을 쓰면서 어릴 적 나무하러 갔던 겨울 산을 떠올렸다. 회색돌밭이 애기장터라고 여겼던 설화를, 돌밭에서 먹이를 찾던 날짐승을 떠올리며 예닐곱 자식들 중 한두 명은 흔한 죽음이었고, 쉬이 잊혀지는 죽음이던 애잔한 시절, 슬픔을 묻을 가슴조차 없던 울 엄니들이 생각나는 겨울밤이어서. 그런데 2022여년 전 헤롯왕이 죽인 두 살 이하 남자 아이들은 다 어디에 묻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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