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1975년 4월 24일 학보사 기자 이인희(외국어교육과 4학년), 박세두(농학과 4학년), 안기옥(농화학과 2학년) 그리고 학생회 대의원 의장이던 외국어교육과 과대표 안광줄(4학년)은 유신헌법철폐와 고 김상진 열사 추모식을 주도했다.

점심시간이라 학우 5~600명이 모였고 전체 사회(박세두), 애국가 제창(안기옥 지휘), 추모시 낭송(이인희), 추모사(안기옥), 폐회 선언까지 마무리하고, 동아일보 백지광고 기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강당에 모였던 학생들이 분노를 참지 못해 중앙잔디밭에 앉아서 유신철폐 구호를 외쳤고, 곧이어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향해 갔다.

미리 와 있던 경찰과 교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결국 경찰이 제지해서 시내로 나오진 못했지만 유신독재에 항거한 경상대학교 학생들의 결기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일로 그날 저녁 문교부의 지시를 받은 교수회의가 바로 열렸고 2명은 제적, 2명은 무기정학에 처해졌다.

서울에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생기고 서울대 농대 김상진 열사가 할복자살을 하고 세상이 유신정권에 떨어져도, 소도시 진주에 있던 학생들은 시국정보를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정보를 알 수 있게 한 것은 학보사 기자들에게 오는 기자협회보 정도였다.

"기옥아, 어떻게 할래?"

인희 선배가 물었고 2학년 안기옥은 추모사를 쓰겠다고 했다.

안광줄 선배는 전방으로 안보교육에 강제로 끌려가야 할 대상이었는데, 본인이 거부하고 그날 추모식에 참석했다.

유신정권은 대학생 학생회 간부와 대의원들을 모아 버스를 대절해서 전방으로 끌고 가, 낮에는 전방 땅굴시찰(당시 땅굴견학이 가능했는지?), 밤에는 술파티를 시키며 혼을 뺐다.

학기 중 그런 교육을 시키기 위해 끌고 갔으니 얼마나 무도한 정부였는지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그날 저녁에 교수회의가 열려서 네 사람에게 징계를 결정하는 것도 모르고, 추모식과 데모가 끝나고 미팅을 갔어. 진주성 서장대에서 국어과 여학생들이 초청한 미팅 약속이 있었던 것이고, 끝날 때쯤 누가 오늘 저녁 자취집에 가지말라고, 경찰이 집 주위에 깔렸다고 귀띔해 줘서 친구 집에서 잤지. 그 다음날 학교에 가는데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농화학과 하 모 교수가 내 손을 끌고 삼천포 공원으로 가는거야.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점심도 뭘 먹었을 거야. 그리고 나를 차에 태우고 진주경찰서 옆에 있는 다방으로 갔어. 좀 있다가 형사에게 인계되었지.“

조사도 없이 별도의 유치장에 갇혔다.

"경찰이 아니고 교수님이요?“

"경찰서 유치장에 가니 박세두, 안광줄 두 사람이 있는 거야.“

"인희 선배는요?“

"여자 유치장.“

"인희 누나가 간곡히 말했대. ‘안기옥은 내가 시켜서 한 것이다’ 그랬대. 안광줄은 계획자로, 박세두는 가담 비율이 적다..... 이런 결과 2명 제적, 2명 무기정학."

문교부는 이렇게 중징계를 요구했고 교수회는 아무 반응도 못했다.

경찰서 유치장 구류기간 안광줄 이인희 30일, 박세두 안기옥 15일.

"아휴..... 참. 교수가 학생을 변호해주진 못할망정 회의 소집도 빠르고 징계도 빠르고......"

안기옥은 무기정학을 먹은 사이에도 진주경찰서에서는 물론 고향 경찰서 보안과에서 수시로 감시했고, 나중에 모범생활한다고 그들이 탄원서를 써 주어 사면되었다. 안기옥이 정학을 당하던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월 복학 허락을 기다리다가 아무 소식이 없자 집에 있을 수 없어 진주로 간다 하고 서울로 가서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파출소 순경에게 내 소재를 밝히라고 압박을 많이 받으신 것 같아. 내가 진주에 있는 줄 알고, 시골 장날 진주로 오가는 장꾼들에게 우리 기옥이 소식 좀 알려 달라며 버스 주차장에서 저녁 늦게까지 진주서 올라오는 장꾼들을 기다리다가 1976년 3월 23일(산청 생초 장날)에 돌아가셨지.”

이듬해 박세두 안기옥은 무기정학이 해제돼 학생으로 돌아왔다. 안광줄, 이인희는 80년대 들어와서 복권됐다. 안광줄은 졸업장을 받아 영어교사가 됐다. 그는 몇 년 전에 은퇴했다.

그러나 이인희는 돌아오지 못했다.

리명길 교수는 이인희 등록금까지 내놓으며 기다렸다고 한다. 이인희는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인희 선배의 회고록은 파일로 받았다.

1976년 안기옥은 무기정학이 해제되어 학교를 나왔다. 다시 농화학과를 다녔는데 공부를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이기준 정신과 진단으로 양가감정 3기 상태였다. 이듬해 농대에서 가장 인문학 쪽에 가까운 농경영학과로 전과를 했다. 정학, 복학, 전과로 대학 2학년을 세 번한 셈이었다. 1978년 리명길 교수가 편안히 숙식을 해결할 형편이 되지 않는 그를 자기 교수 연구실에서 자며 생활하도록 했는데 겨울이 오자 난방 때문에 애로사항이 생겼다.

리명길 교수가 그때 김장하 선생을 찾아가 안기옥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그해 가을부터 김장하 장학생이 된 것이었다.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세세히 들은 김장하 선생은 선뜻 대학, 대학원 학비며 생활비를 대주었다.

김장하 선생을 형님이라 부르는 안기옥 선배.

"이인희 누나와 리명길 교수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리는데 아득한 역사를 떠올리게 해주어 얼마나 감사한지."

그는 이인희를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오래전 학보에 실린 시를 보여주었다.

이인희 이름으로 쓴 내 시였다.

"아, 이 시를 읽었어요. 인희 누나가 쓴 줄 알고 연락하려고 했지만 못했어.“

"1988년 경전선 열차를 불태운 경상대생, 그날 왜곡된 중앙언론을 성토하며 쓴 시인데 학교신문사 후배가 부탁해서 쓴 거예요. 필명으로 쓰고 싶어서 언뜻 생각난 이름이 이인희였습니다. 리명길 선생님 ‘가좌동 편지’에서 본 이름,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부끄러워요. 떳떳하게 제 이름으로 해야 했는데."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김상진 학생은 꽃다운 나이에 유신독재를 외치며 할복했고 생을 마쳤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됐다.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논의를 금지한다."

1980년 4월 11일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5년만에 치렀다.

1974년 3월부터 1975년 1월까지 동아일보는 백지광고를 냈다. 1975년 3월 동아일보 일부 부서가 폐지되었고 기자들이 해직되었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조직했고 해직기자들은 1988년 한겨레신문을 만들었다.

그런 시대였다.

 

####1

<<나무>>

나무여도 비는

슬픈 눈물이 된다.

바람으로 동서남북

춤을 추지만

살려는 의지는 뿌리로 하여

가지만큼 뻗는다.

솟아 오른 지열(地熱)로

세월을 따지면서

푸른 잎은 하늘로 하늘로

태양을 안고

꽃잎을 4월처럼 느끼는

화사한 이상.

얼룩진 무늬만큼

스친 시대가

거대한 벽만큼이나

바람을 막고 서서

새끼를 친다 새끼를 친다

사는 나무여 나무여

<리명길 진주시단 제4집. 1975>

이 시는 리명길 교수가 네 명의 제자들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2

<<가좌동(加佐洞) 편지>>

모래밭에 잭크나이프

꽂아 놓고 돌아설 때

미움이 저려오는

그때는 황혼이었다

헤어져 헤어져 가더래도

군화발소리 멀어졌으니

젠장 사내 의지로 하여

감추던 슬픔만큼

그리운

고향같은 칠암벌에 해를 띄운다

감상(感傷)의 세월 위에 25년

뱀같은 숱한 눈도 보인다

손끝에서 끊어지는 테이프에 달려서

당신만은 그대만은 돌아오리니 기다린

텁도록 어리석었던 이야기로 밤이 쌓일 때

싱겁게 읽어주던 대필사연이 끝나고

설마하던

살아남고 안개 피우는

어설픈

세상살이 위에로 밀려오는 외롭던 한

어화롱 찔렁대는

산소언덕에 줄을 짓고

뒤뚝거리는 꿩새끼들 어쩌다 그들 생각이 났다

화려한

수형의 기록도 없이

그늘로만

간 이인희(李仁姬)며

무심결에 생각나는 그 많은 이름 위로

시집도 한권없이

달래던 진한 시심에

한백도 즈믄도 넘을 고재욱(高載旭)같은 눈빛

김호길(金虎吉)이 비행사되어

띄워보낸 하늘환상곡

이영성(李英成)이 귀먹은 길에

종소리도 탑이 되던 날

백일장에 끊어진 자욱이

스무해로 가락이 운다

죽어서 차라리 좋다는 천국같은

터울을 셈하며 눈을감고 짚은 점처럼

발갛게

더 발갛게 타오를

씨뿌리며

복받을이

생명이란 분명하게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흠여(欠如)된 부분에 어울리고 채워가는

꽃밥에 엉킨 바람 나비 벌레

이리하여 꽃이 피듯이

함성도 메아리도 파도처럼 남아있는

무섭도록 고요한

전율(戰慄)같은 순간으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움추려서 파닥댄다

나이를 새겨두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고개끄덕인 일기장에 분통이 번지는

기원(紀元)의 복귀가 보이는 사람이여 노래여

<터울 제3집, 1988년〉

이 시는 리명길 교수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서 교수재임용에서 탈락하고 이후 경상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지 못한 채 진주문화원 원장으로 있을 때 쓴 시이다

 

###3

2월 2일 김주완 작가의 「줬으면 그만이지-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북콘서트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MBC경남 다큐 「어른 김장하」에 대한 감동과 영상을 만든 작가, 연출가에게 축하 박수를 보냈다. 김장하 장학생들과 책을 읽은 독자들의 감상평을 듣는 시간은 감동 그 자체였다.

어쩜 그렇게 다들 가슴 따뜻하게 살고 있는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사는지 한마디씩 할 때마다 뭉클했다. 그날 마지막 발표자 한 분이 내 오랜 기억과 어떤 이에 대한 깊은 연민을 일깨워 주었다.

책에도 영상에도 소개되지 않았던 그 분도 김장하 장학생이었다.

처음엔 고 리명길 선생 품 안에 있었고, 리명길 선생께서 김장하 선생을 소개해 대학원 학비까지 지원받아 공부한 사람이라 했다.

리명길 선생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이인희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1975년 경상대학교 민주화운동사에 중요한 인물이었고 여러 명이 제적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누군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행사마치고 그분께 인사를 드렸다.

"혹시 이 이름 기억하십니까?“

설문지 한 켠에 연필로 쓴 ‘이인희’ 이름을 보고 그분은 놀랬다.

"내가 바로 그 당사자입니다. 인희 누나가 나를 대신해 제적당했고 난 무기정학을 당했어요. 내 이름은 안기옥."

나는 명함을 드리고 행사장을 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카톡이 왔다.

내일 오전 일정을 오후로 미루고 차 마실 시간 만들어 보자고 했다. “진주에 올 때마다 장하 형님만 뵙고 유목민처럼 있다 갔는데 이렇게 옛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하며..

다행히도 다음날 회사에 인사발령이 있어 자유출근하라고 했다.

안기옥 선배(이제 통성명했으니 선배라 부름)와 사무실 아래 커피집에서 그해 있었던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

이인희에 대한 이름을 처음 안 것은 당시 우리가 내었던 시조문학 동인지 ‘터울3집’에서였다. 돌아가신 박노정 선생님이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고 우리 몇몇은 이인희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는 내가 기억한 만큼 기억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내 기억했다.

1975년 4월 칠암캠퍼스 강당에서 결기를 다짐했던 그들 네 명이 궁금했고 그 시대 교수들이 궁금했고 진주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정치권력에 비춰보고 싶은 마음도 .

안 선배가 간직하고 있던 이인희 선배 회고 글은 복사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