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1975년 4월 24일. 그날 진주 유치장에서 어떤 기자는 고문을 당하였고, 어떤 교수들은 울었고, 어떤 교수는 자신의 제자를 유치장에 인계하였다. 우리의 정학, 제적 소식을 듣고 어떤 학생들은 울었고 나머지는....“

국립경상대학교 72학번 이인희 회고록을 읽었다. 2월에 쓴 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끝부분에 잠깐 쟁였던 회고록이다.

1972년은 제4공화국이 출범, 유신헌법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던 시기였다. 통일주체국회의란 단체가 박정희 유신헌법을 지지하며 찬성률 91.5%를 기록했다.

유신시대는 전국에 위수령과 긴급조치 선포를 내렸고 긴급조치 9호까지 발동, 1979년 해제될 때까지 젊은이와 지식인과 예술가를 핍박했다. 권력층이 할 수 있는 반이성적 행동을 다 보여준 시대였다.

그러나 산업 노동자 반쯤, 농민 반쯤, 공적임금을 받는 이들 대부분은 유신시대를 찬양했다. 찬양하도록 길들인 계층이 있었고 다들 길들여졌다. 1972년 출발점에서 지금까지 찬양은 이어진다. 잘했다, 못했다 가를 수는 없다. 모두가 내 이웃이고 가족이기 때문이다.

1975년 도랑물처럼, 봇물처럼 넘쳤다 묻힌 선배들의 몸부림을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기억해 주는 일은 기억하는 자의 예의라 여겼다.

미래가 보장된 사범대학 학생들, 고 김상진 학우 추모식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제적되고 정학당한 수모를 그냥 흘려버리기엔 가혹했다. 그들은 이제 70대를 넘겼고 아름다운 20대를 역사 속에 묻었다.

1975년 인혁당재건위원회 조작 사건으로 사법살인이 있었고 이에 분개한 청년이 할복했다. 청년들은 분개했고 그저 그런 선생들과 교수들은 침묵했다. 세월이 그렇게 갔다.

1960년 4월 11일 열일곱 살 소년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올랐다. 혁명이 일어났고 독재자는 물러났다. 쫓기듯 본래 그가 있던 곳으로 갔다. 거기서 죽었다. 그러나 혁명은 온전한 길로 이어지지 못했다.

1975년 4월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난다"고 외치던 스물일곱 살 청년이 이 땅에 남긴 것은 거대한 파도였다. "이 경직된 사회는 젊은이의 희생을 요구한다". 누군가를 꼭 희생시켜야 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가.

선배 세대가 치른 희생의 값어치가 바닥을 치는 시대. 사월을 읊고 아픔에 공감한다는 마음도 의심스러운 시대.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그대로이거나 수렁에 빠졌을 때 그대로이다.

1980년 4월 11일에서야 옳은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또 그를 추모했다.

1980년 5월 광기가 있었고 1985년 대학에 학도호국단체제가 없어지고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청년은 그때도 싸웠고 이후에도 싸웠다.

세월은 어떻게 흘러 노동자의 잉여가치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은 의도대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위정자들은 그들이 짜놓은 판이 그대로 되기를 바랐고 다음 기회를 위해 또 포장했다. “내가 다했다 아입니까!” 이러면서.

2014년 416참사로 우리의 4월은 또 참담했다. 9년 동안 참담했다. 정치는 슬픔을 기억하는 이들을 억압하고 미워하도록 만들었다.

꽃이 피고 지고 4월이면 시인보다 시인 아닌 사람들이 더 시인이 되는 계절, 우리의 4월은, 특히 대한민국의 4월은 달력에서 북 찢어내고 싶은 달이 되었다.

다시 이인희 선배 회고록으로 돌아간다.

갑자기 기자 세 명을 잃은 학보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얼마 전 전화를 걸어 당시 편집부장 허상천 기자에게 묻는다.

“그때 학보사 기자가 3명이나 유치장에 가 버려서 학보 만드느라 애 먹었겠네요” 허 기자가 답한다. “몰라, 기억이 안 나는데...... 이제 이렇게 같이 늙어간다."

4월의 청춘, 세월 속에 묻힌 봄도랑물 같았다고, 미미한 존재였다고 숨죽여 살았던 그 청춘들을 기억하며.

"이인희 안광줄 구류 30일, 제적, 복권은 되었으나 홀로 일어섰다. 박세두 안기옥 구류 15일 ,무기정학(1975년4월), 복권이 되어 모두 불같이 살았다 "

2023년 4월에 어떠한 것과도 비교해서는 안 될 기억이라 여기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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