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1931년생 김두영 아저씨는 1968년에 덕산에 후생당약방을 열었다.

안의면에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가세가 빈한하여 담임선생님 도움으로 겨우 학업을 했지만 중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어 중퇴를 하고 덕산으로 이사를 왔다. 외숙 문의원 도움으로 20여 년간 병원 조무원 일을 하며 1967년 약종상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약방 면허를 얻어 문을 열었다. 시천면, 삼장면 사람들은 거의 이 약방을 이용했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에게는 왕진까지 가서 봐주었다.

덕산 버스 정류소 맞은편에 약방이 있어 나는 진주 가는 버스를 탈 때마다 멀미약을 사러 들어가곤 했다. 장날이면 장꾼들이 봇짐을 한 더미 지고 버스를 기다리던 곳. 멀미약을 다 마시면 깔끔하게 쓰레기통에 넣는 아저씨가 좀 깨까롭다 여겼는데 성품이 곧고 검소하여 늘 주변 정돈을 하느라 그러시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아저씨는 울 아버지랑 갑장이고 동네에도 갑장이 더러 계셨다. 우리 아버지는 농사일 때문에 같이 어울릴 만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회갑일에 마을 대표 몇 분과 함께 명예졸업장을 만들어 낭독해주었다.

후생당약방 아저씨는 자신이 약을 팔아 번 돈을 마을주민과 마을에 있는 학교를 위해 다 주었다. 1982년 덕산고등학교 1회 입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내놓으셨다. 나는 그것이 처음인 줄 알았다. 1977년부터 2000년도까지 대학생 11명에게 78회나 학자금을 대주었고 덕산중·고등학교 91명 학생에게 271회나 학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1982년부터 2002년까지였다.

나는 1982년 덕산고등학교 후생당약방 장학금 수혜자였다. 그래서 나는 진주로 유학을 나오지 못했다. 당시 신설 고등학교이고 공립이라 학생 유치가 시급했다. 덕산중학교 3학년 동기들이 두 반 정도 그대로 고등학교로 올라간 것이었다. 외부에서 온 학생은 중학교 선배 두어 명 재수생 같은 학생이었다. 중학교에서는 아예 없었던 장학금 제도가 1회 입학생부터 있었으니 어려운 시골살림에 학부형들은 좋아라 했다.

나는 입학을 하고도 한 학기 내내 진주여고로 가지 못한 원망을 속으로 삭이며 보냈다. 1회생들은 입학년도에 장학금을 받고 그 후에 들어오는 후배들도 계속 입학성적 우선으로 받았을 것이다.

아저씨는 고등학생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대학교 등록금도 몇몇에게 주었다. 동네 친구 아버지가 한 번씩 약방 의자에 앉아 돈을 세고 있는 것을 봤다. 친구 대학등록금을 받아가는 모양이었다. 나도 울 아버지께 부탁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와 한 약속이 있어서 꺼내지도 못했다. 한 학기 등록금만 내주면 나머진 알아서 하겠노라고.

난 약속을 지켰다. 대학교지 기자로 들어갔다. 4학년 1학기까지 전액장학금을 받았다. 난 운이 좋았다. 몇 년 전에 3년간 모교 후배들에게 장학금 돌려주기 운동에 동참했다. 7학기 280만원 혜택받고 36만원 돌려준 셈이었다.

아저씨 장학사업은 그 이전부터 있었는데 난 최근에 알았다. 극빈자들에게 무료로 투약해 주고 약방을 해서 번 돈을 평생 기부하며 살아오셨다. 1987년 시천면사무소를 새로 지어야 했는데 1500여평을 어렵게 구입해 희사하였고 삼장면 대포경로당, 시천면 내대경로당 신축하는데도 1억에서 몇 천만원까지 기부하였다.

진주의 김장하 어른 못지않은 분이다.

세월이 지나 송덕비를 세웠다. 덕산문화의집 서쪽 마당 끝에 송덕비가 있다. 2003년에 제막식을 했다. 송덕비 세우기 전에 허ㅇㅇ이라는 분이 전화를 했다. 고등학교 입학 때 장학생이었냐고. 송덕비 완공식에 오라고 하였다. 완공식에는 못 갔지만 송덕비 앞을 자주 지난다. 유방백세라는 말이 높은 벼슬살이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더냐, 이런 선행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 싶었다.

약방 아저씨는 물론 이런 공덕비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2002년까지 아저씨 기부 날짜가 끝이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그분 아들이 2002년부터 지금까지 자기 모교에 엄청난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었다. 첫해에 시작하면서 10년만 하겠노라 했다는데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것. 어릴 때 약방 창문으로 얼핏 보았던 애리애리한 학생이 그분이었다. 김장하 선생처럼 아들도 장학금 증여식은 물론 학교에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그래서 나도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것이라 했다.

약방 아지매 돌아가시고 아저씨 연세도 적은 게 아니라 지금은 약방을 지키지 못하신다. 연로하시나 명성은 오래 갔고 동네 어른들 오명가명 말동무 서로 하는 모습 본지 엊그제 같은데 세월 유수하여 아저씨도 울 아버지도 아버지 친구들도 한 시대를 묻고 창문에 어른어른한 듯 그래 보인다.

한 마을을 지탱하고 공고히 하는 일에 어찌 한 사람 힘으로 되더냐, 세금과 부역으로만 되더냐. 여럿이 몸과 마음을 합치면 더 견고하게 살기 좋은 것을. 다만 한 사람이 주는 영향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면사무소 땅 때문에 아버님께 비우 상한 일이 있었어요. 아버님도 사람인데 속상한 건 속상한 일이었지예. 그때 어머님이 '고마 이자삐소. 다 조따 아임니꺼' 하셨대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줬으면 그만이지" 두 분 마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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