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현증조고학생부군신위(顯曾祖考學生府君神位), 현조고학생부군신위(顯祖考學生府君神位), 현형학생부군신위(顯兄學生府君神位),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제사 때가 되면 아버지는 벼루에 먹을 갈아 지방을 썼다. 한지를 정성껏 잘라 가는 붓으로 한자 몇 자를 일렬로 썼는데 돌아가신 분이 누구냐에 따라 글자가 달라진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벼루는 나무 벼루집에 먹물을 머금고 담겨 있었다. 먹 하나, 가는 붓 두 개가 늘 같이 들어 있었고 누런 한지는 족보책 속에 늘 있었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아버지가 설 추석 때, 큰아버지 부부 제삿날, 증조부 증조모 기제사까지 챙기며 지방을 쓰는 일은 늘 무슨 의식을 치르듯 했다.

논에서 흙투성이가 된 다리로 돌아오시어 저물녘 어둠을 씻어내듯 몸을 씻고 어두침침한 백열등 아래 엎드려 세필에 먹물을 찍어 글씨를 써내려갈 때면 아무도 옆에서 얼씬거리지 않았다.

육이오 전에 좌익으로 몰려 총살당한 큰아버지와 옆에서 악다구니하던 큰어머니까지 총살당하니 장남으로 기제사를 떠맡게 된 아버지. 할아버지가 제주일 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제주로 먹물을 만들 때면 간혹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세월을 얼마나 먹었는지 작은 벼루 복판은 움푹 패였고 웅덩이처럼 먹물이 고였다. 서예를 한 것도 아니고 오직 제사 때만 썼던 벼루.

학교에서 방학 숙제로 붓글씨를 쓰거나 수묵화를 그려야 할 때, 난 아버지 벼루를 썼다. 미술시간에 배운 대로 매난국죽을 그렸고 국화를 그리기 좋아했다. 신문지를 방바닥에 깔고 가로 세로 선긋기 연습을 했고 하얀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면 아버지는 신기한 듯 지켜보았다.

국민학교 때는 한글쓰기 숙제가 있었는데 ‘국어사랑 나라사랑’ 여덟자 혹은 넉 자를 써서 숙제로 냈고 상도 받았다. 동네 만물상에서 파는 먹과 벼루가 내 손에 들어올 때까지 아버지 벼루를 썼고 아버지는 붓펜이라는 간편한 제품이 나올 때까지 숱이 빠진 붓을 썼다.

1995년 늦가을, 쯔쯔가무시로 세상을 버린 아버지, 그 후 벼루에 먹을 가는 소리는 멈췄다.

제주가 오빠로 바뀌고 붓펜이나 싸인펜으로 지방을 쓰는 시대가 와서 아버지 벼루함은 어딘가에서 먼지를 쓰고 있겠다 싶었다. 친정에 남아 있을 것이다.

주위에 서예하는 사람들 볼 때마다 아버지 벼루가 생각난다. 글씨를 배우고 싶거나 한국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는데 글씨 쓰는 사람 옆에서 먹을 가는 일은 해주고 싶다.

친구 여경이나 서예가 순원 선생 곁에서 한번쯤 먹을 갈아 진한 먹물이 붓끝에 묻어 학처럼 춤을 추고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부드러운 춤사위 같은, 그런 모습을 한번쯤 보고 싶다.

아버지는 1991년까지 무학이었지만 환갑되던 해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후생당약방 아저씨와 동네 갑장 아저씨 여러분이 오셔서 마당에서 졸업장을 안겨주셨다. 한글을 읽거나 책을 읽을 때는 드라마에 나오는 서당 학동처럼 음을 넣어 읽었고 어디서 배웠는지 노랫말도 공책에 적어 두셨다.

돌아가신 후에 유품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금반지 하나 남은 것은 막내에게 주자고 합의했다. 나는 아버지 필적이 있는 공책을 갖겠다고 했다. 물론 옷은 다 태웠다.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은 다 두었다.

아버지 벼루에 먹물을 조절해 그린 국화는 지금도 벽에 붙어 있으려나.

방학 숙제로 글쓰기, 독후감, 수채화, 붓글씨, 만들기 등을 잘했다고 상을 많이 받았는데 선생님께서 내가 많이 받아 간다고 생각했는지 좀 좋은 상품 하나를 슬쩍 바꿔 다른 친구에게 주는 것을 봤다. 나도 모른 척 했다. 1978년 국민학교 6학년 때 일이다.

아버지 벼루를 쓰면 먹물이 참 잘 먹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간혹 썼지만 시골학교 미술시간은 서예도 그림도 오로지 기능평가를 위해 있는 것이어서 취미생활로 실력을 기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만족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기본글씨쓰기를 배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학교 선생님들이 정성껏 지도해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체육도 그림도 음악도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셨다. 집에서 연습하고 더 잘하려고 애썼고 그때 배우고 익혔던 정서훈련이 평생을 따라 온 것이다.

낡고 초라한 벼루를 바꿀 생각도 하지 않고 평생을 곁에 두고 살아오신 아버지는 지방을 쓰는 일 외에는 한번도 벼루를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나처럼 예술적 행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벼루에 닳을대로 닳은 먹쪼가리 갈리는 소리, 물기가 날아가 진득거릴 때까지 둥글게 둥글게 갈았던 옛 방에 백열등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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