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씀바귀 , 냉이 , 고들빼기 , 돈나물  쑥 , 미나리 ,머위  .....
어머님이  집  앞  밭두둑을  잠깐  지나오신다.  손에  한  움큼  풀들이  가지가지  비닐종이 조각에  싸인 채  뜯겨온다.  초록빛  식물도감을  보는듯  부엌  바닥을  내려다 보면  어머님  밥상이  봄풀에  성찬이  될  것을  안다.

남편이  마트에서  사온  공산품과  그에  딸려온  비닐포장  쓰레기  한  되박이  극대조를 이루는  풍경.

봄날이거나  가을이거나  어머님  바깥 나들이  끝에  난   부자가  된다.
이런  봄날  또  부자가  된다. 이름모를  풀들이  이름을  달면  풍요로워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어머님  이  나물  이름이  뭡니꺼?"
"비들기  나물  , 바꽃나물. 민들레나물"
민들레 나물은  알겠는데  비들기  나물  바꽃은  도저히  모르겠다. 비들기 나물은  비듬나물인  듯하다.
고들빼기를  말하는  걸까? 바꽃인지  투구꽃인지  찾아보았다.
고들빼기는 좀  비슷했다. 바꽃은  투구꽃이라고  나왔다. 그건  독초 비슷하다  했다. 어머님  언어는  참으로  알기  어렵다.

봄날이  아니라도  어머님은  잠시  외출  중에도  어느 순간 지팡이로 풀숲을  헤쳐보신다.  그냥  발에  밟히는  잡초인 줄  알았는데  이름이 있고 의미가  있다.
백과사전을  애써  찾지  않아도  되었다. 평생을  밭두둑에서  왔다갔다  사셨으니  눈에  보이는게  예사  풀들이  아닌  것이다.

요  몇  년간  우리  가족  생존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외부에서  벌어오는  돈이  많이  없기  때문에  내부에  있는  돈을  안쓰기로 혹은  적게  쓰기로  결사  다짐했고,  선사시대  사람들처럼  어머님  손 끝에서  나오는  먹을 거리  하나에도  고마워하며  살기로  했다.  제조품을  멀리하고  꼭  안먹어도  되는  것, 꼭  안 먹어도  되는  시간까지  선을  그어  견디는  연습을  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았어도 먹지 않았던  풀들을  챙기게  되었다.  도마만한  땅이 있어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는  우리  조상들.  뭐든지  넘치는  세상에  너무  심한  청승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아온  그  마음들이  이제사  이해가  되었다.  또  그것을  흉내내  보았다.  몸이  가벼워졌고  근심통도  줄어들었다. 땅을 빌려   일구고  잊었던  콩이름, 푸성귀  이름을  되뇌어보았다. 세상의  부유함이  무채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풀  한  줌, 굴밤  몇  알로  온  세상을  스윽  디디고  가는  힘이  어머님  삶에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일까?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공산품  이름에서 유혹  떨쳐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코로나19로 각자의  삶이 낙엽처럼  흩날리고 심지어 사람으로부터 관계도 닫아지고, 그 여파로 마음도 우울해졌다. 모두에게 처음인 역병을 대하는 태세에도  정답은  없었다.

그동안  쉼없이  살아온  자본주의  시대를  뒤돌아보는  성찰로  대해야겠다는 마음만이  앞섰다.  봄풀이 주는 즐거움, 활기가  없었다면  우리들 병이  더  깊었으리라. 해마다  어김없이  어머님  손가락에  붙은  열 개의  눈과  귀는  정확했다.  추운  겨울이  남긴  우울감이  그렇게 잠시  멎었다. 풀들이  이름을  갖고  그  이름을  불러주니  따뜻한  공기가  안겨왔다.

봄은  사월에  , 사월은  봄이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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