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미운동이 한창일 무렵 동네 아지매들이 농사일 없을 때 부업을 했다. 동네 서당골띠 큰 아들이 장갑 짜는 기계를 들여와 사업을 했는데 마무리하는 과정에서는 사람 손이 필요한 단계라 집집마다 한 자루씩 들고와서 일명 "시야기(마무리)"작업을 했다. 완성품 켤레 수에 따라 돈을 쳐주었다. 우리집도 그 작업을 했다. 기계에서 막 짜낸 벙어리 장갑 원판은 납작하게 짜여졌고 가장자리에는 코바늘 작업을 할 수 있게 편물코가 죽 늘어져 있었다.

짙은 남색, 검정색 벙어리 장갑이 어머니 손끝에서 마무리되면 기계에 살짝 올을 피워 무슨 앙고라 스웨터처럼 털이 복슬복슬하게 마무리하기도 했다.

그 작업을 몇 년 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삯을 착착 모아 작은 이개를 장만했다.

아마 장터 최대목집에서 짰을 것이다.

초가집에서 양철집으로 바뀌고 부엌 부뚜막이 바뀌고 마루 한켠에 빨간 페인트칠에 니스를 입힌 반질반질한 이개.

비싼 자개장 대신 짠 일명 장식장 같은 것이었다.

우중충한 농만 보다가 화려한 이개를 보니 유리문 안에 예쁜 접시며 인형을 넣어둬야 멋이 났는데 우리집에는 오랜 그릇들만 포개져 있었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세월이 지나면서 이개 장식장 아래칸은 제기를 넣어두는 공간이 되었고 가끔 크리스탈이라는 유리그릇도 들어앉았다가 상으로 받은 트로피도 들어앉았다가 파리똥에 모기가 눌러붙은 유리짝이 천덕꾸러기가 될 때까지 그 허름한 고향집에 있었다.

그런데 이개라는 말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자개에 못미쳐 이개라고 했을까? 자개는 최고이고 그 다음 이인자로 이개일까 별의별 추측을 다해 보았지만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장식장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차곡차곡 모았던 어머니. 절미운동도 그런 것이었다.

아침에 쌀 씻기 전에 한 숟가락씩 덜어내어 항아리에 모았다가 되박이로 될 정도가 되면 그것을 돈으로 팔아 통장에 넣었던 것 같다. 전국적으로 다했는지 우리 마을에서만 했는지 모르지만 몇해 동안 그런 절미운동을 했다.

벼농사 지어 배나 곯지 않을 정도면 다행이던 시절 동네 가내수공업자가 등장한 것은 그래서 더욱 커다란 행운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홀치기라는 것을 해서 시집갈 밑천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험한 농사일에 고운 손톱을 가질 수 없었던 어머니에게 장갑 완성하기 부업은 숨통 트이는 돈벌이였다.

그 뒤 더 세련된 장갑이 대량으로 쏟아져 가내수공업으로 먹고 살던 사당골띠기 아들은 더 이상 번창하지 못했다. 그렇게 들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어느 시점 시골 농부집 담 너머 보이는 빨간 이개가 주위 세간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런 부조화와 도드라짐이 어머니의 로망이었다.

옛 자개 농짝이 재활용 수집장에 나오고 동사무소표 딱지가 붙어나오고 어느 카페 벽면에 붙어있고 화가의 그림 속에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은 고인이 된 어머니를 생각한다.

자개장에 광택을 내고 애지중지하며 마음 뿌듯해했던 필부의 행복. 그런 자개장롱에 못지않게 보배인듯 반질반질 닦고 호호거리며 먼지를 닦아냈던 낭자머리 어머니들.

휴대폰만 열면 무수한 광고들이 쏟아지고 마음을 흔드는 예쁜 가구들이 넘치는 요즘, 그리고 돈만 있으면 원하는 장식장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시대, 유럽의 귀족집에 있다 팔려나온 엔틱가구에서 공장에서 뚝딱 만들어진 철제 가구까지 넘치고 넘치지만.

아파트 한 벽면에 빨갛거나 검거나 촌스러운 이개 하나 두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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