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문 앞으로 봇짐을 진 한 무리 사람들이 짐을 풀었다. 봄이 저물 무렵이었을까. 말씨가 다른 그들은 우리집 사랑채에 며칠 묵으며 동네 밥상을 고쳐주고 갔다. 작은 술상에서 밥상, 좀 더 큰 교잣상까지 부러진 다리를 끼우고 찍혀 나간 상 모퉁이에 조각을 감쪽같이 붙여 카슈칠을 하고 말려서 새것으로 만들어놓는 재주, 서너 사람이 죽이 척척 맞아 온 동네 밥상을 다 고치고 나서야 그들은 길을 떠났다.

할아버지 주무시는 사랑채방 한쪽에 칼잠을 자며 객지에서 돈벌이했던 그 사람들은 우리 식구랑 밥도 같이 먹고 마루에서 쉬기도 하고 일을 마치면 그렇게 유랑의 무리처럼 어디론가 떠났다.

밥값 방값은 받았을까? 난 그게 궁금하였다. 며칠을 묵고 일했으니 식량도 축이 많이 났을 텐데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가마솥에 하얀 쌀을 안쳐 밥을 고봉으로 먹였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강 저쪽 마을 이야기도 귀담아들으며 이방인들과 살갑게 지내셨다.

그들은 옳은 장인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어깨너머로 배운 목공 기술을 타지에서 써먹었던 모양이다. 떠돌아다니는 삶이 고달팠을 텐데, 비싼 품삯을 받은 것도 아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어디 발붙이고 따숩게 살 팔자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할머니와 어머니의 중간 나이 정도 되는 보따리 기술자들과 세간살이 하나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은 어머니 세대가 가진 알뜰함이 왈칵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시간.

여름이 오기 전에 광택을 내고 흔들리고 딸깍거리는 상다리를 잽싸게 고쳐 장마철에 찐득거리는 느낌에서 보송보송한 느낌으로 미리 준비하는 자세, 그리고 준 장인급 기술자들이 손봐준 것이니 얼마나 뿌듯했을까.

내 기억으로 우리집 소반은 서너 개였다. 할아버지 상, 아버지와 할머니가 쓰는 겸상용 밥상, 제사 때 쓰는 상, 나머지 식구들이 쓰는 상 등이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참 썼는데 나중에는 너무 닳고 헐어서 손님이 오면 내놓기가 부끄러웠다.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려놓고 할아버지 할머니 밥을 먼저 푸고 상 위에 올리면 식구들이 돌아가며 사랑채까지 들고 갔다. 정지 문턱을 넘고 축담을 내려딛고 사랑채 섬돌에 상을 놓고 문을 열어 할아버지 무릎 앞에까지 밥상을 들고가기까지 몸 균형을 잘 잡아야 했다. 그런 상다리를 고쳐주는 사람들이 다녀가면 밥상은 더 단단해졌다.

가끔 국그릇이 출렁거려 밥상 위에 흘러넘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가시나가 조심성없이.....’ 하며 혀를 찼다.

'그라모 할매가 한번 들어봐라, 꼬부랑해가지고. 할매는 상 한번 안 들고 감시로.'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우리 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였다.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농촌에서 해야 할 그 많은 센 일은 하지 않으셨다. 늘 뒤에서 구시렁거리기만 했다. 돌아가시고 관 속에 누었어야 허리가 펴졌다.

세월이 지났고 꽃무늬가 그려진 양은 도리뱅뱅밥상이 나오고, 남원 목기가 지리산을 넘어오고, 원목 식탁이 생기고, 이태리 대리석 닮은 인조 대리석 식탁이 생기고, 철제 공예품이 생기고, 집집마다 세간 모습은 날로 달라졌다. 촌스럽고 유난스러웠던 이개장처럼 가끔 서툰 못자국이 있는 소반, 일인용 밥상, 이인용 밥상도 허름한 고방 구석에 거미줄을 감고 있다가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랑채 앞에 멍석을 깔고 동네 사람들이 들고 온 상을 이리저리 살피며 다리도 고치고 상판도 매끈하게 문질러주던 두꺼비 같은 손, 머리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얼굴도 희미한 아낙네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귀에 익은 전라도 말투만 기억에 남는다. 그들이 돈벌이하는 동안 열 몇 살은 되었을 아이들도 산 너머 저쪽 고장에서 무탈하게 잘 자랐겠지, 황톳길 여기저기서 부모를 대신해 집을 지켰을 터.

일그러진 우리 세상살이를 채워주고 문질러주고 광택을 내주는 사람, 말꽃(문학), 삶꽃(예술), 추억과 기억, 마을과 나라, 그 무엇이든 장마철에 끈적거리는 찝찝함을 말려주는 반 소반장이 유랑자가 그립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