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쓰는 칼이 네 개 있다.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칼들이지만 날이 무디어지면 번갈아 쓰려고 항상 순서에 맞게 둔다. 음식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큰 살림도 아니지만 칼은 자주 무디어진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숫돌에 갈아준다. 숫돌에 칼 갈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어릴 때 나무하러 가면 아버지께서 숫돌에 물을 적셔가며 낫을 갈아주시곤 했는데 조선쇠낫으로 나무를 하면 비쩍 마른 참꽃대와 싸리나무 가지들이 쓱쓱 베어지는 소리에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칼가는 일이 의례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숫돌에 칼가는 일이 드물어지고 세상에 좋은 칼들이 주부들 마음을 사로잡는 시대라 칼가는 소리 듣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 단지 띠께이(뚜껑) 버리지 말거래이. 나중에 칼 가는 거 할 때 씨모 된다."

어머님이 우리집에 오셨던 해 항아리 뚜껑 하나가 딸려왔다. 난 거기에 국화꽃도 띄우고 매화도 띄우고 화반으로 썼는데 어머님은 나물바구니 물받이로 쓰고 가장자리에 칼을 대고 쓱쓱 가는 것이었다. 무 썰다가 칼이 안 들면 꼭 거기다 한번 칼날을 대는 것이었다. 그게 효과가 있는지 나도 갈아보았다. 우선은 효과가 있었다.

명절날이나 김장을 할 때 큰집에 가면 칼 가는 일은 남편이 도맡아했다. 혹여 숫돌질할 남자들이 늦게 돌아오면 샘가 돌에도 갈고 그러시더니 이제는 씽크대 한 켠에 항아리 뚜껑을 두고 참 요긴하게 쓰시는 어머님. 아흔이 넘어서도 세세한 경험들을 놓치지 않으시고 지혜롭게 응용하신다.

숫돌에 대한 기억이 언제부터 끊어졌는지 모르지만 순식간인 것 같다.

벼 베는 일, 소 꼴 베는 일, 나무하는 일을 하지 않은지 수 십년이 넘었고 조선낫처럼 대장간에서 육철로 만든 낫을 쓰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거의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왜낫으로 벼베기를 하고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숫돌은 거의 쓰지 않았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결혼을 하고 살림을 하다 보니 가끔 칼을 가는 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남편이 베란다에 하나 사다 놓고 종종 갈아주곤 했다. 그동안에는 큰집에 가서 숫돌에 갈아왔는데 일일이 그러기가 귀찮다며 사다 놓은 것이다. 옛날에 쓰던 숫돌인지는 모르겠다.

숫돌로 쓰는 돌은 퇴적암 종류인 수성암이라 한다. 칼날과 낫슴베가 슥슥 갈릴 때마다 회색빛 가루가 젖은 채로 묻어나던, 돌가루인지 쇳가루인지 끊임없이 갈려 나오던 기억. 그런 숫돌 하나로 농경사회를 당당하게 살아온 아버지 세대 유물을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기억하며 쓰고 있는 건 부엌칼 때문이다.

어릴 때 덕산 다리 밑에 장날에만 서는 대장간이 있었다. 지금은 그 아래 농협 건물이 들어서고 시멘트길이 이어져 있지만 돌밭과 돌담 사이 농기구를 다듬고 칼을 다시 두드려주던 불쟁이가 있었다. 장날만 되면 연장을 고치러 온 산중 사람들, 농꾼들 하나 둘 모여 소일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숫돌로 날을 다 세우지 못한 연장들을 손보고 다듬어갔던 모양이다.

여름이면 강물이 넘쳐 쉬 잠겼던 곳, 시절 탓도 있겠지만 자연재해에 견디지 못했을 장터 대장간이었다. 그날 칼을 다듬고 간 날에는 틀림없이 식육점에 들러 돼지고기 한 근이라도 썰어갔을 것이리라.

요즘에는 칼세트에 숫돌 기능까지 딸려 나온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기능을 가진 칼을 쓰지 않으니 가끔 숫돌이 필요하다. 항아리 뚜껑도 가장자리가 닳아 매끈해질 때까지 써볼 생각이다. 부엌용품까지 외국산이나 세련된 디자인제품으로 채워지고 요리를 할 일도 점점 줄어드는 시대 내 공간 한 켠 더디게 가는 시계도 있음 좋겠다 싶어 지난날 숫돌과 몸통 잃은 옹기 뚜껑을 들먹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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