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일 진주성이 불탔다.

전쟁으로 산천이 부서지고 사람들 살점과 핏줄기가 폭음과 함께 찢어지고 갈라졌다.

그런 시절 이야기다.

젊은 시아버지는 인민군들이 퇴각할 때 소달구지를 끌고갔다고 한다.

형님은 장남이라 안되고 동생들은 어려서 안되고 만만했던 게 시아버지였는지 인민군들 짐 나르는 부역에 지목된 것이다.

폭격으로 진주다리는 부서졌고 길도 험했는데 소달구지에 물자를 실은 인민군들이 진주를 벗어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모양이었다.

몇 날 며칠을 갔는지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밤 얼굴이 해골같이 해가지고 소고삐를 꼭 잡고 돌아오셨더란다.

"소 끌고 오니라고 이리 늦었십니더."

스물 여섯이었고 장골이었다. 농가에서 소 한 마리가 얼마나 중요한 재산이었는지 절실하게 아는 아들이었다.

"아이고, 이 놈 아야. 소 그기 뭐시라꼬? 어서 내삐고 도망 와야지 ."

살아 돌아온 아들에 대한 반가움과 사람 애간장 태운 원망이 저마다 가득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살아돌아왔다니.

일본에서 식솔들을 이끌고 귀국한 시할아버지 살림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아들 하나는 비참한 나라에 살기 힘들다며 밀항을 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고 한 아들은 배라도 곯지 않으려고 군대에 자원해 들어갔다.

군대에 간 분은 전쟁 나기 전 옹진 전투에서 사망했다. 미혼이었다.

우린 해마다 그분 제사를 지낸다.

뒤에 살아돌아온 이의 말에 의하면 밤에 자고 있는데 북한군이 몰래 들어와 수류탄을 던졌다한다. 아마 그때 전사한 것 같다 했다. 가족들은 육이오 이후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는데 뒤에 현충원 기록을 보니 육이오 전 서해안 일대에서 일어난 국지전에서 사망했음을 알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발을 내리고 살아가려고 아둥바둥 하신 분들은 시아버지와 위에 형님이었다. 지난 번 애갱띠와 러브스토리를 일으킨 분이 장남이었다. 대목수라 입에 풀칠은 면하고 고만고만 살았지만 소 고삐 잡고 겨우 살아온 시아버진 그해 전쟁터에 끌려갔다.

"가면 죽는다고 도망다니다 동네 어디에서 탁 잡혀 안갔나?" 어머님 말씀으론 몇 년을 군대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셨다.

다행히 일본에서 글도 배우고 글씨도 좋아 전선에까지는 투입되지 않았나 보았다.

"저거 아배가 글을 잘 쓴께 위에서 다른 데로 안보내줄라캤대. '니, 여기 내 밑에 있거라. 거기 가면 죽는다.' 함시로. "

지금 생각하니 행정병으로 후방에서 복역을 한 듯했다.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어머님 기억은 시아버지 군대 가기 전에 담배 만들기 가내수공업으로 이어졌다.

진주 배건네 있던 전매청이 폭격으로 부서지고 담배 공급이 어려워지자 개인이 담배사업을 해도 되었던 시기였다. 큰집 작은집 식구들이 힘을 모아 담배종이를 자르고 엽초를 빻아 반듯하게 말아 작업을 했다. 그렇게 만든 담배를 식구들이 조금씩 장에 메고 가서 팔았고 그 날 번 돈은 모두 시어머니 (내겐 시할머니) 앞으로 다 모아 드리면 단지에도 모으고 또 분배하고 그랬다한다.

"전매청이 뽀사져놓으니 담배가 있나. 그래서 집에서 말아 팔았제. 미국 삼촌(막내 시숙부)은 담배 말다가도 난 공부하끼다 하며 내빼삐고... 학교도 지가 알아서 턱하니 찾아가더니만 사관핵교 안갔나".

어머님보다 두 살 어린 시숙부는 그랬다. 해방과 전쟁 사이 생사가 엇갈리고 이후 세월에 다들 어찌어찌 살아왔으리라 상상도 못할 일을 구순이 넘어도 기억하고 계시니 한번도 타지로 가서 살아보지 않으신 어머님 기억이 짠하기만 하다.

1950년 7월 31일부터 9월 24일까지 진주시민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이었다. 서로 완장을 차고 친구끼리 형제끼리 새로운 질서에 핏대를 올렸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그 짧은 시간에 온 도시가 통제되다니. 각종 건물마다 행정조직이 착착 들어서고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시기였음에도 토지개혁과 정치보위부, 진주시당, 진양군당, 진주시인민위원회, 진양군인민위원회 등에 각종 연맹까지 짜여졌으니 민중이 살아가는 공간에 또 하나의 막이 쳐져 그들을 지배하는 망들이 왔다갔다했다는 말이 아닌가.

"미군기가 와서 폭탄을 얼매나 뚜디러 내리는지 우리도 집 뒤 굴 속에 피신했다 아이가. 굴에 있다가 어떤 사람들은 피난간다고 나왔다가 죽고. 에나 우리맨치로 굴에 있으시모 될낀데."

"붕데미:부흥디미(지금 서부청사) 앞에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뭔 사람들을 거기서도 쏴 죽이고."

어머님이랑 이틀밤을 같이 자봤다.

소변보러 최소 다섯 번은 일어나셨고 나이들면 숨쉬기도 어렵다더니 쌕쌕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드라마를 보지 않는 시간에 옛이야기를 살살 여쭤보면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

내게는 낯선 진주 지명에 대한 발음이 자꾸 헷갈려 몇 번이고 여쭤보고 듣고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그러시는데 남편이 옆에서 말하기를 "그기라도 기억하는 게 어디고?"

그랬다.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이제 거의 사라지고 그 세대들이 겪었던 난리와 역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화석이 되는 이 순간도 빛의 속도로 흩어진다.

"이 땅에 태어나 한평생 살자면 난리 두 번 , 흉년 세 번은 겪는다."는 말이 있다.

또 난리가 나거나 흉년을 서너 번 겪으면 우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소 고삐를 잡고 강을 헤쳐 집으로 찾아온 어른처럼 강인하게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어머님 지난 세월 들을 때마다 내가 살아내는 일들이 작고 여리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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