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정권 압제 수단으로 '검열'된 노래들
2022년 윤민석 곡이 다시 들리는 까닭은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산울림의 노래 '청춘'이다. 꺾거나 굴리지 않는 음색이 좋고, 곡조에 담은 그만의 언어가 좋고, 짓는 미소와 천진한 그림까지 나는 김창완이 좋다. 어언 40년 묵은 '청춘' 또한 함께 늙으며 흥얼거려온 곡조다. 근데 그 노랜 청춘이란 주제의 언어치고는 너무 매가리가 없고 체념적이라 그답지 않다 여겨왔더라.

얼마 전 TV에 출연한 그의 회고를 들으며 연유가 풀렸다. 애당초 붙인 가사는 "갈 테면 가라지/ 푸르른 이 청춘"이었는데 음반 사전 심의에서 "너무 염세적"이란 이유로 '퇴짜' 맞았다는 것이다. 악랄한 군사정권의 검열이 김창완의 여린 노랫말에까지 미쳐 그 가녀린 저항을 시르죽은 절념으로 순치시킨 것이다.

군부독재 정권은 시민의 정서를 통제하는 압제의 수단으로 대중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가려 금지했다. 왜색풍, 창법 저속, 불신 풍조 조장, 퇴폐성이 발라내는 대상이란다. 물론 판단 근거는 '자'를 쥔 자의 입맛에 달렸을 뿐이다. 청와대 집무실서 일본 군복에 말채찍을 들고 섰는가 하면 '동백 아가씨'를 즐겨 불렀다는 박정희 사후의 후일담은 그래서 더욱 우리를 무참하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160㎝에도 못 미치는 자신의 키에 빗댔다는 이유로 설마 '키다리 미스터 김'을 못 부르게 했을까.

"내가 정권 잡으면 완전히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권력이란 게 잡으면 수사기관이 알아서 입건하고 수사한다"라 했다는 어느 '여사'의 어록처럼 그딴 짓들은 모두 윗전의 심기 경호를 위한 아랫것들의 충성심이 일으킨 과잉행동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그런 기시감이 현실로 드러내는 것을 목도하며 어이없는 역사의 역진에 아연할 뿐이다.

홍창신 칼럼리스트
홍창신 칼럼리스트

2022년산 '윤민석'의 노래 '지랄하고 자빠졌네'가 들려온다. 또다시 거리에서 '윤민석'의 새 노랠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문재인·김정은이 함께 백두산을 오르고, 북미 수교의 싹이 보이며 평화의 기운이 돌고, 한류열풍이 지구촌을 휘감아 세상이 우릴 알아주고, 왜의 경제침략을 이겨내고 온 나라가 합심해 코로나를 막아내고, 그래서 우리는 한 단계 더 질 높은 세상에 이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수구 기득권의 힘은 막강했다. '기레기'와 찰떡 공조로 '내로남불'이란 단어를 무한 반복하며 조국 일가의 목줄을 물고 흔들던 힘이 마침내 득세하는 약진을 이룬 것이다.

오지랖 넓은 소리지만 촛불이 세상을 뒤집고 난 후 나는 작곡가 윤민석이 사명처럼 떠안고 온 그 고달픈 작업을 그만 접었으면 했다. 단 몇 줄의 간결한 문장으로 시대의 핵심을 짚고 그걸 단순하고 경쾌한 음계에 실어 세상을 달구던 그 빛나는 재주로 이제 광고음악도 만들고 유행가도 터뜨려 돈 벌어 편히 살았으면 했다. 그러나 그가 호사를 누릴 세상은 아직도 요원한가 보다.

그래 너희들이 말하는 대로/이재명은 전부 가짜인지도 몰라/프레스에 찍힌 팔도 가짜고/그의 공약도 모두 거짓일지 모르지/코로나로 서민들은 피눈물을 흘리고/생활고에 자식 죽인 부모가 자살하는/이 개 같은 세상 거꾸로 된 이 나라/누군가는 바로 잡아야 하겠지만/그래도 너흰 아니야 너흰 아니야/너흰 나라를 걱정할 자격 없어/주술 법사 사건조작 주가조작 잔고조작/이젠 아예 검찰왕국이라니…. 윤민석의 노래 '너흰 아니야'에 새 가사가 덧입혀져 다시 불린다.

 

*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