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남을녀 의식은 깨어 앞장서 나가는데
지도자 자처한 자가 시대의 진보를 막아

이준석이 해냈다. 장애인 단체인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는 욕설 전화가 쏟아지고 지하철 시위 현장에선 휠체어 행렬을 향해 침을 뱉거나 욕지거리를 퍼붓는 적대와 겁박의 수위가 높아졌다. 그 빨간 옷 당의 새파란 정치인이 이른바 혐오 배설의 도덕적 브레이크를 제거해준 덕이다.

20대에 정치입문 후 험악한 그 바닥에서 10년을 버텨 당 대표에 오른 만큼이나 그가 부리는 술수의 주도면밀함은 묵고 노회한 '꾼'을 웃돈다. 하루에도 몇 차례 SNS 질을 해대길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해서 뜻을 관철하겠다는 일부 장애인들의 시위방식은 문명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짓"이라며 준엄하게 발뒤축을 구르며 사전 정지작업을 했다. 그리고 '토론'이라는 '문명적 방도'라면 얼마든지 응할 수 있다며 일대일 공개토론을 제의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두 말도 못 하게 발라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서울대에 하버드까지 걸친 박식에다 입을 열면 쉼표도 마침표도 구실을 잃고 마는 속사포형 달변까지 장착했다. 말발로는 불감당이란 것이 자타공인의 정평인데 까짓 장애인 대표쯤이야 해장거리나 되겠는가.

그러나 장애인단체도 바라느니 소원이 <백분토론> 출연이란다. 수십 년 관청에다 대고 "차별을 말라, 복지혜택을 늘려 달라, 교육권을 침해 말라, 이동권 보장하라" 외쳐도 마이동풍이다. 정치인들에게 읍소하면 약속은 찰떡같으나 선거 끝나면 말짱 도루묵이다. 결국은 시민의 지지에 호소할 수밖에 없으니 그걸 얻고자 갖은 용을 써도 기사 한 줄 제대로 나는 바 없다. 그러므로 길바닥으로 나서는 것이다. 쇠사슬에 서로의 몸을 얽어 넉장거리를 해야 언론 명색은 겨우 그 선정성을 사준다. 그래서 그나마 지하철역에 리프트가 놓이고 수많은 눈총 속에 그 위태로운 것을 탔다가 떨어져 죽고. 죽고 또 죽으니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며 또 그 처연한 행렬을 벌이는 것이다.

JTBC의 <썰전>에서 벌인 박경석·이준석의 토론은 예상대로였다. 박경석은 법전에만 박혀있는 장애인의 권리보장법, 탈시설 지원법, 평생교육법, 특수교육법 등의 집행 난맥에 관해 간곡히 말했다. 사람들에게 그 용어들은 관심도 없고 맛대가리 없는 공허한 소리다. 하지만 그들로선 수십 년 투쟁주제가 그것인데 그걸 빼고 뭘 말하겠는가.

이준석은 서울 지하철역의 승강기 설치율이 93%에 달하고 100% 계획이 추진 중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일분일초가 아까운 출근길 시민을 볼모로 소란을 일으키는 불법성과 야만성을 부각했다. <썰전>은 무리한 주장으로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는 어눌한 '떼꾼'을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화려한 언변의 청년 정치인이 징치하는 이벤트로 예정된 것이었고 성공적이었다.

1992년 아비 부시가 서명하고 퇴임한 미국 장애인법의 골자를 무식하게 규정하자면 '장애인에게 입장료를 깎아주거나 안 받는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되 누리는 데 걸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시민 개인의 핸디캡을 국가가 평등하게 보정하라는 것이 그 법의 준거다.

우리도 소수자 권익을 포괄하는 차별금지법이 2007년 국회 발의됐으나 15년이 지나도록 제자리걸음이다. 성소수자를 악마화하는 극우 개신교계의 격렬한 반대가 의회를 움켜쥐고 있는 까닭이다. 국민 70%가 제정에 찬성함에도 말이다. 갑남을녀의 의식은 깨어 저만치 앞장서 나가고 있는데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갖은 요설로 진실을 가려 시대의 진보를 막고 있다. 통탄한다.

 

*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홍창신 칼럼니스트
홍창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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