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가을농사철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진짜 바빠서 여우가 애를 업고 가도 모를 철이지만, 요새는 애가 없어서 뺏길 일도 없겠습니다. 어쨌건 이렇게 한 바쁨이 있기 전에 농가에서는 서로 간에, 지난여름에 수확한 깨나 고추가 남은 것이 있냐고들 연락을 하고는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여름에는 가뭄과 폭염, 폭우 3종 세트가 겹쳐 ‘기후위기란 이런 것이다.’ 라고 대놓고 경고를 하는 셈이었지요. 그러니 전국적으로 밭곡식이 흉작이었습니다. 어쩌다 잘 된 집도 있지만, 시쳇말로 그것은 재수가 좋았던 것이고 대부분은 평년에 못 미치는 형국이었습니다. 특히 고추는 지난겨울부터 초여름까지 내내 지속된 가뭄으로 초기 초세(草勢)가 나빠서 개량된 대과종 고추가 왜성 고추 모양을 하는 등 수확량이 확 줄었습니다. 그러니 가을 초입에 고춧가루를 찾는 전화가 잦았던 것입니다.

사실 노지 고추 농사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잦은 비에 탄저병이 걸리면 아예 농사를 접어야 하기도 하고, 또 물빠짐이 좋지 못하면 역병이 걸려 시름시름 말라 죽는 것도 예사입니다. 거기에다 한여름 태풍이라도 맞게 되면 제아무리 튼튼하게 지지대에 묶어 놓아도 가지가 부러지고, 때로는 뿌리째 뽑히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노지 고추 농사는 위험성이 너무 커서 차라리 사먹는 것이 낫다며 농사를 포기하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추측건대 대기업이 농업에 진출하더라도 노지 고추 농사 영역에는 절대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을 해봅니다. 병이 덜한 시설 고추 농사에는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노지 농사는 꿈도 꾸지 않을 것입니다. 비가림 시설에서 고추 농사를 지으면 맛이 어떤지 농사짓는 분께 물어봤더니, 매운맛이 조금 덜할 뿐 별 차이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품종의 고추가 농사조건에 따라 매운맛이 덜하다는 것은 맛 차이가 조금은 있다는 얘기겠지요. 우리나라 고추는 매운맛과 함께 단맛도 강하다 합니다. 그래서 단지 향신료가 아니라 중요한 맛을 내는 양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노지 고춧가루의 맛이 얼마나 맛난지 요리를 좀 해본 사람은 압니다. 햇고춧가루로 생김치를 담가 먹으면 비교 불가의 깊은 맛이 느껴집니다. 또 비린 맛이 강한 멸치와 고추를 다져서 고추 다대기를 해 먹는 경상도 내륙의 소문난 음식도, 전남에서 끝물 풋고추와 통멸치로 맛을 내서 가으내 먹는 고추조림도, 고추의 독특한 성질을 알았기에 개발될 수 있었던 음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풋고추든 고춧가루든 요리에 고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정말이지 신의 한 수인 듯싶습니다. 고추 생산에 그렇게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도 고추의 독특한 성질을 알기에 농민들은 자신이 먹을 양보다 더 넉넉하게 농사를 짓고 나머지는 판매를 하나 봅니다. 특히 여성농민들에게 농업소득이 잘 주어지지 않더라도 고추를 판 돈은 여성농민들이 독점을 하곤 합니다.

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고춧가루는 가공품입니다. 따라서 이를 판매하려면 즉석판매제조 가공업 허가를 받아서 최종 소비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지역 내 로컬푸드 직매장 등 판매장에 납품하려면 식품제조 가공업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주로 참여한 직매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종소비자에게 제공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자에게 가공품을 납품하려면 식품 가공법 기준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농민들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동네 방앗간에서 가공하여 직매장에 납품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직매장에 진열했다가 판매불가 지적을 받은 사례가 전국 여러 곳에 있습니다. 물론 고춧가루를 파는 개인이 식품제조업 위반으로 신고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갖는, 그러나 생산은 몹시도 어려운 고춧가루는, 농민들이 농산물 가공에 손쉽게 참여하는 대표적인 상품인데도 현실 법에서는 농민이 권리를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식품의 가공과 유통에 관한 법이 농민을 생각해주는 것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안전성만을 강조하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판매되는 가공품에 적용되어야 할 기준을, 얼굴 있는 생산자의 판매 시스템에도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그러니 농민들에게 농가공은 먼 얘기고, 결론적으로 농식품 기업에 유리한 것이지요. 이제 막바지 거래가 이뤄지는 고춧가루를 보면서 농가공의 허와 실을 봅니다. 6차산업이 멀리 있는 이유도 말입니다.

* 이 기사는 [한국농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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