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회의 대중화를 가로막는 어려움 중 일부가 극복되는 곳이 우시장과 도축장이 있는 지역이었다. 서울 함평 익산 영천 대구 함안 진주 등지가 그런 곳이다. 하지만 이런 지역에서도 육회는 잡자마자 바로 소비해야 하는 시간적 한계에 묶여 있었다. 그것을 극복시켜 준 것이 냉장기술의 발달이었다.

우리나라에 얼음공장이 생기고 냉장기술이 도입된 것은 1910년대 이후이다. 겨울철에 먹던 평안도의 메밀국수가 서울에서 여름철 대중 음식 '평양냉면'이 된 것도 당시 도입되기 시작한 냉장기술과 얼음공장 설립 그리고 아지노모토(MSG) 덕분이라고 한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진주 우시장은 영세 소규모 비공식 우시장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 공식 우시장으로 되면서 경남 대표 우시장이 되었다. 1920년대가 되면서 진주에는 우시장, 도축창이 정비되고 '중앙시장' 내에 정육점이 들어섰다. 음식점에 신선한 고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 생겨난 상설 시장에서 정육점을 열거나 음식점을 겸업하는 백정들도 늘어났다. 그에 따라 돈을 모은 백정들도 많이 생겨났다."(<형평운동>, 김중섭 지음) 1923년 진주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백정해방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 때에 냉면의 육전뿐만 아니라 육회비빔밥에 신선한 생고기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진주에서 가장 오래된 육회비빔밥 전문식당이 문을 연 것은 이러한 환경이 만들어지고 나서인 1927년이다.

황규민 약사
황규민 약사

"진주비빔밥은 향토음식으로서의 명성과 역사적인 의미, 그리고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춘 음식이다. 진주비빔밥은 그 맛과 영양성이 뛰어나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즐겨먹는 음식 중 하나였으며, 특히 태종 때에는 한양의 정승들이 비빔밥을 먹기 위해 천리 길 진주를 자주 왔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주시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글이다. 진주비빔밥 하면 일반적으로 '육회비빔밥'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음식인문학자 주영하는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아직까지 조선 후기 문헌에서 오늘날의 육회비빔밥 같은 음식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책에서는 "조선시대 왕실 문헌에서...(비빔밥을 의미하는) 골동반이나 교반을 기록한 문헌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도대체 진주시 홈페이지의 그 '기록'이 무슨 기록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뿐만아니라 그 옛날 비빔밥을 먹기 위해 진주까지 그것도 '자주 왔다'는 그 '한양의 정승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이 거리상으로나 시간상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비빔밥의 유래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다. 제사 음식을 나눠 먹었다는 음복설, 바쁜 농번기에 밥과 나물을 비벼먹었다는 농번기설, 동학농민혁명 때 부족한 음식들을 비벼 나눠 먹었다는 전주비빔밥 유래설, 진주성 싸움 때의 진주육회비빔밥 유래설 등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워낙 자연발생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안동 헛제사밥처럼 진주에도 헛제사밥이 있었고, 음력 정월 대보름날 묵은 음식들을 비벼 먹어 없애기도 했고, 바쁜 농번기에 이것저것 섞어 먹고 또 가정에서 자연적으로 비벼 먹기도 하였을 것이다.

1920년대, 냉장기술에 힘입어 신선한 생고기를 공급가능하게 하는 우시장-도축장-정육점-음식점의 생태계가 완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했던 비빔밥이 국밥 등과 함께 근대적 외식업의 한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이미 상업화된 비빔밥이 우시장 근처에서 생고기와 만나게 된 것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 위에 빨간 고추장 한 숟갈이 얹혀졌다. '진주육회비빔밥'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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