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여러분. 오늘 우리 마을에 가수 남진이 옵니다. 우리 마을을 테레비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옵니다. 아홉시 반까지 회관으로 모여 주십시오.” 동이 트기도 전에 마을 확성기가 골짜기를 울렸다. 아홉시 반이 되도록 서너댓 번은 울렸을 것이다. 어슴프레 날이 밝아올 무렵 밭에 나와 감자밭고랑 김매기를 하는데 아침 내도록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며칠 전이었다. 마을 이장이 전화를 해왔다. “부인이 음식을 잘한다면서요. 방송국에서 우리 마을 촬영을 나오는데 고사리 음식을 찍는대요. 가수 남진이도 온대요. 부인이 고사리 요리를 해주면 좋겠
일흔 넷에 글로벌 스타로 부상한 배우 윤여정 님의 기사는 언제 봐도 기쁘고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브래드 피트보다 빛났던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 장면을 유튜브로 몇 번이나 돌려보고, 과거 예능방송 출연 장면도 일부러 다시보기 할 만큼. 스스로 ‘생계형 배우’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진솔한 내면을 발견하고, 초보 감독의 독립영화에 과감하게 출연하는 노장의 도전 정신에도 감탄사 연발이다. 옷은 또 얼마나 잘 입는지, 남들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소신이 패션에 투영되는 거라면, 나도 항공잠바를 사입어? 잠바라도 따라 입으면 뒤늦게 소신 비슷한
“이거 큰일이네. 이제 어떻게 해요?” 마당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걱정스런 말투로 읍내 다녀오는 나를 맞았다. 군청과 농어촌공사 사무실과 농협을 다녀온 나의 어깨도 푹 쳐져있었다. “그러게, 어찌해 볼 도리가 없네. 다들 안 된다고만 하고.”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목돈을 장만할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지들을 생각해봤지만 요즘 세상에 돈을 꾸기가 그리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은 일찍이 하고 있었다. 필경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마을 앞 언덕바지에 있는 농지를 판다는 사실을 우
그날 밤 9시경, 나는 통영에서 진주로 오는 국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아니, 달리는 건 자동차였고,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으며, 혼자였다. 그리고 초보였다. 평소 자동차는 집과 일터를 오가는 출퇴근용이었고, 낯선 길은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진입하는 일이 없었다. 익숙한 길만 골라 다녔기 때문이다. 이 구간을 밤에 달려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취재차 통영에 들렀다 시간이 늦어졌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네비만 잘 따라가면 되겠지. 그러나 가로등이 대낮같은 통영 시내를 벗어나 캄캄한 국도로 진입했을 때야 알았다. 칠흑같은 어둠의
밥솥을 열자 물이 찰랑거렸다. 이런 정신머리하고는. 취사 버튼 누르는 걸 깜빡 하고 말았다. 식탁에선 아이들이 숟가락 뜰 준비를 하고 앉아있었다. 30분 더 기다리자고 하면 민원이 끓어오르겠지. 심심하면 도지는 취사망각 증세를 실토하고, 지갑을 챙겼다. “우리 오늘 김밥 먹을까?” 잠옷을 겸하는 추리닝 복장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 늘어진 무릎 부분이 거슬렸지만 어차피 마스크도 썼겠다, 알아볼 사람도 없는데 뭐. 아파트 상가 분식집에서 김밥을 담은 검은 봉지를 달랑거리며 바삐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00에미야
해마다 이맘때면 목련공장이 문을 연다. 전 과정 수동식, 일종의 가내수공업쯤 되겠다. 우선 장롱 안에서 찾아낸 전기장판으로 부지를 조성한다. 그 위에 가로세로 약 1미터 너비의 흰 종이를 깔고, 꽃망울이 터질락말락 하는 꽃송이를 조심스레 올린다. 그러나 이 몇 줄로 전체 공정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급작스럽게 동원된 꽃송이들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낯빛이 노래져서 뻣뻣하게 노려보는데 기세가 여간 아니다. 심상치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목련 공장의 본사(?)는 한적한 시골 밭에 위치하
온종일 비가 내렸다. 이웃마을 술동무 연락을 받고 면소재지 내장탕집에 나가 제법 술을 마시고 초저녁 집으로 돌아오자 이제 막 저녁밥상을 물린 식구들이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뭐야, 오늘 국가대표 축구하는 날인가?” 아내의 어깨너머로 텔레비전을 기웃거리는 내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텔레비전 화면 귀퉁이에 ‘윤스테이’라는 프로그램 이름이 눈에 들었다.“민박집 이야기야?” “그래요. 구례 쌍산재예요.” 그제서야 보름이가 말을 받았다. “와, 좋네. 집이 대궐이네.” “지난번 가봤는데 완전 고택인데다 대숲이 너무 좋더
며칠 된서리가 내렸다. 서리는 나날이 두터워지고 있다. 이른 아침 밭에 나가니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삶의 막을 내린다. 내내 밭두렁을 뒤덮었던 호박넝쿨 속을 기웃거렸다. 올해 마지막 애호박을 대여섯 개 땄다. 산등성에 비친 아침 햇살이 빠른 속도로 내 발등을 지나 마을까지 밀려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햇살을 가득 담은 감국은 진한 향을 토해내고 개울가 느티나무가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어제 팥을 베어놓은 밭이랑에서 장끼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뒤따르던 꽃분이가 켕켕거리며 밭두렁 끝까지 뛰어간다. 장끼는 건너 굴참나무 뒤로 사라진
추석이다. 이른 아침 맞은편 산언저리에서 한 움큼 산밤을 줍고 밭을 둘러본다. 지난여름 긴 장마에 습해를 입은 우엉은 대부분 죽었다. 우엉 옆 이랑에 심은 토란은 내 키만큼이나 자라 무성한 잎을 자랑한다. 애지중지 돌본 생강은 그럭저럭 반타작은 될 것 같다. 올해는 생강을 다섯 이랑이나 심었다. 보름이(며느리) 카페에 생강이 많이 필요해서였다. 생강으로 차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라떼라는 것도 만들다보니 생강이 많이 든다고 했다. 지난해는 생강을 많이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었다. 생강 값이 비쌌고, 친환경으로 농사지은 생강을 구하기도
밤새 잠을 설쳤다. 어제 저녁(18일)은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함께 해온 사람들이 여기 지리산까지 온다는 거였다. 지난번 출판기념회로는 모자라다면서 축하하는 자리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아내는 하루 종일 음식을 장만하기에 바빴고, 나는 밭일에 매달렸다. 장맛비가 내려 이른 아침부터 우의를 챙겨 입고 서리태를 심었다. 오전에는 양파 캐낸 밭에 들깨모종을 옮겨 심었다. 정오를 한참 지나서야 밭일은 끝났고, 오후엔 음식을 만드는 아내를 거들었다.음식을 만드는 내내 아내는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대상포진으
“거긴 뭐 하러 가요. 그런 사람 다시는 보지도 마소.” 점심 먹고 골목 평상에 나가려는데 아내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오전 밭일 마치고, 점심 먹고, 좀 쉬다 골목 평상에 나가는 것이 요즘 일과였다. 이웃 몇몇이 모여 농사이야기를 나누거나 민화투를 치면서 한더위를 피하는 평상이었다. 오후 네 시를 넘어서면 또 다들 밭으로 나가 텅 비는 평상이었다.그동안 나의 평상 나들이에 아내는 한 번도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안 나가고 뭉기적거리고 있으면 얼른 나가라고 내 쫓기도 했고, 집에 먹을거리라도 있으면
“아버님 오늘은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돼요.” 보름이가 정색을 하며 다짐을 받으려 했다. “허어, 오늘은 술을 좀 마셔야할 것 같은데. 이거 낭패네.” “여하튼 안 돼요. 오늘은 참으셔야 돼요.” “내일로 미루면 안 돼? 오늘은 멀리서 ‘페친’이 술 가지고 온다는데.” “어제도 오늘로 미루셨잖아요. 안 돼요. 오늘은 꼭 약을 먹어야 해요,”거듭되는 성화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긴 했지만 억울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하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온 가족이 구충제를 먹어야 한다는 거였다. 가족이 약을 먹기로 한 날은
밤새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지난 장날 모종 구해 심어둔 밭이 걱정이다. 조금 일찍 따 먹으려고 조금 일찍 심은 게 욕심이었지 싶다. 올해는 윤사월이 들어 봄이 길 거라는 이웃의 말을 허투루 들었다. 모종을 구하던 날 이웃이 걱정스럽게 말렸지만 서리는 안 내릴 거라고 우겼었다.며칠 전까지 서리가 내렸고, 일찍 심은 청양고추와 파프리카 모종 이파리가 허옇게 말라버렸었다. 산두릅 딴다고 숲을 쏘다녀서 고단한 몸인데도 윙윙 골짜기를 치타는 바람소리에 몇 번이고 바깥을 들락거렸다. 온도가 얼마나 내려가나 확인하기 위해서지만 달리 손 쓸
코점이가 죽었다. 마당 길고양인데 코에 까만 점이 있어 붙여준 이름이다. 코점이는 우리와 여덟 해를 살았다. 코점이 어미는 예삐, 보일러실 입구에 죽어있는 코점이를 거둘 때 예삐가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대략 서른 마리의 길고양이들이 우리 집 마당을 드나드는데 그 중 여섯 마리는 현관문턱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들이다. 코점이도 그 중 한 마리였다. 아주 추운 날이면 그 여섯 녀석은 현관문 밖에 대기하고 있다 문을 열면 들어와 식탁 아래 따뜻한 곳에 올망졸망 모여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코점이는
아내는 또 봄나물을 캐러 나갔다. 봄나물이랬자 많이 커버린 쑥과 꽃대궁이 나올 것 같은 냉이와 아직은 어린 머위와 원추리가 전부였다. 아내의 봄나물 캐기는 용돈벌이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민박손님도 거의 끊겼고, 통장에 조금 남긴 돈으로 살아가면서 목욕비나 한의원 가는 비용이라도 벌어보자고 시작한 일이 봄나물 캐기였다.서울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요청이 있었다. 봄나물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몇 있으니 캐서 보내달라는 거였다. 며칠 전부터 준비해오던 아내는 엊그제 처음으로 봄나물과 파김치를 담가 보냈다.“내일 성안터에 머위나
“어머니, 우리 어떡할까요. 카페 문 여는 거요.” 아침밥상머리에서 보름이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그러게,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문을 열어도 걱정이고 안 열 수도 없고.” 아내의 말 속에 섞인 걱정이 더한 듯했다.며칠 전부터 보름이는 겨우내 쉬었던 카페 문을 열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에 바빴었다. 야외테이블에 모양 좋은 타일을 붙이고, 조그만 식기세척기도 들여놓으며 주방 구조도 바꾸었다. 나도 덩달아 카페 일을 도왔었다. 산언저리에서 싸리나무 두어 짐 잘라 와 울타리를 손질해 주었다. 지난 가을 마을
“어머니, 그냥 두세요. 괜찮아요” 열심히 냉장고를 닦는 아내 곁에서 보름이가 말했다. 애가 타는 듯한 말투였다.“이게 내 얼굴 같아서 그러는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장고를 닦았다. 속을 다 비운 냉장고는 깨끗하게 변하고 있었다.오늘 새 냉장고가 들어오는 날이다. 오후 다섯 시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도 아내는 날이 밝자마자 냉장고를 비웠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닦기 시작했다.스무 해 넘게 써온 냉장고였다. 냉장고는 낡을 대로 낡아 아래쪽은 온통 벌겋게 녹이 슬었다. 고무테가 닳아빠진 문틈
해가 바뀌면서 아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더 이상 PC방에 가지 않는 것. 그렇다고 게임을 끊은 건 아니고 대신 집에서 한다. 우리 집 컴퓨터 사양이 PC방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뒤엔 대단한 결심이 있었다. 여기서 ‘결심’의 주체는 아들이 아닌 우리 부부. 우리는 냉장고 한 대와 맞먹는 비용을 지불하고 낡은 컴퓨터를 사이키 조명 번쩍거리는 최신형으로 바꾸었다.툭하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버리는 컴퓨터를 새로 바꾸자는 요구는 사실 1년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귓등으로 흘리다가 실행하게 된 이유는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고등
‘짐 많으면 연락하소. 마중 나갈게.’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첫차로 읍내에 나간 아내는 목욕탕 가고, 한의원도 들르고, 반찬꺼리 챙겨 한 시 버스로 들어온다고 했다. 주말에 민박손님이 꽤 많으니 짐이 만만치 않을 거였다.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오기에는 제법 멀고 길이 가팔라 벅찰 일이다.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말고 마중을 나가려는데 아내가 문간을 들어서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양팔에 들고 가방은 어깨에 걸머졌다. “전화하라니까. 팔 빠지겠다.” 맨발로 마당으로 나가
새해 들어 이명이 심하다. 왼쪽 귓속에서 얄궂은 소리가 난다. 어찌 들으면 골인지점에 이른 마라토너의 거친 숨소리 같기도 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래톱에 밀려드는 파도소리 같기도 하다.한밤중 잠에서 깨었을 때 들리기도 하고, 이웃집 사랑방에 모여 민화투를 할 때도 들린다. 어떤 땐 크게, 어떤 땐 낮게, 또 어떤 땐 낮았다 높았다를 반복하기도 한다. 쇳소리처럼 크게 자극적이지 않고, 귀뚜라미 소리나 말매미 소리처럼 요란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소한부터 사흘 동안 내린 비는 개울을 채웠다. 한겨울에 개울물 불어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