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지난 장날 모종 구해 심어둔 밭이 걱정이다. 조금 일찍 따 먹으려고 조금 일찍 심은 게 욕심이었지 싶다. 올해는 윤사월이 들어 봄이 길 거라는 이웃의 말을 허투루 들었다. 모종을 구하던 날 이웃이 걱정스럽게 말렸지만 서리는 안 내릴 거라고 우겼었다.

며칠 전까지 서리가 내렸고, 일찍 심은 청양고추와 파프리카 모종 이파리가 허옇게 말라버렸었다. 산두릅 딴다고 숲을 쏘다녀서 고단한 몸인데도 윙윙 골짜기를 치타는 바람소리에 몇 번이고 바깥을 들락거렸다. 온도가 얼마나 내려가나 확인하기 위해서지만 달리 손 쓸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 김석봉 농부

새벽, 마당에 내려서니 주먹덩이만한 별들이 산등성이 위에서 반짝인다. 꽃밭에 커다란 통을 묻어 수련을 심어두었는데 물이 얼지는 않았다. 하긴 바람이 이처럼 사나운데 요동치는 수면이 얼 턱이 있나. 공기가 차다. 필시 조선오이모종과 수박모종은 얼었을 것이다.

제법 푸릇푸릇 자란 감자는 그래도 땅에 뿌리를 내렸으니 큰 탈은 없을 거고,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얼갈이배추와 열무와 상추도 스스로 움을 틔었으니 스스로 몸 단도리를 할 것이다. 온실 속에서 자라와 낯선 땅에 이주한 몇몇 모종들이 고역이겠지.

어머니가 한 달을 못 넘기실 거라고 한다. 지난 2월에 뵙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석 달째 요양병원을 찾아가지 못했다. 면회 절대사절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상태를 가끔씩 전화로 전해 들었는데 어제는 형이 병원으로 찾아가 의사 상담을 했다는 거였다. 큰 병원으로 옮겨도 영양주사를 맞아도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올해 아흔 여섯, 살 만큼 사셨으나 누릴 만큼 누리지는 못한 삶이었다.

주말 지나고 부산을 다녀와야겠다.

오늘은 장모님 기일, 아내는 친정엘 갈까 말까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네 자매가 모두 올 수 없다는 기별을 받았다고 한다. 그럴수록 가까이 사는 우리라도 가봐야 하는데 아내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하다. 처남 홀로 덩그러니 제사 지낼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저녁나절 휘근이 운전 시켜 잠시라도 다녀와야겠다.

나이 들수록 집안일에 더 신경이 쓰인다. 마음이 헛헛해지고 외로워서일 것이다.

뒷마당에서 덤벙이가 꽥꽥거린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덤벙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무슨 일로 바쁘게 산다고 뒷마당도 한 번 돌아보지 못했을까. 물과 먹이 주는 일은 내 차진데 물그릇이 비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날이 밝으면 마른멸치 삶고 식은 밥 말아 한 양푼 챙겨줘야겠다.

봄이 되면 덤벙이의 짝지 새데기는 사나흘에 한 개씩 알을 낳는다. 거위의 번식기인 봄에만 알을 낳는데 알이 주먹덩이만하다. 저울에 올려보았더니 달걀의 다섯 배였다. 부화를 시도하기 위해 새데기는 낳은 알을 품는다. 그런 새데기를 밀쳐내고 알을 들고 나오는 내 모습을 덤벙이와 새데기는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가 참 야멸찬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위는 사나흘 계속될 거라고 한다. 산두릅 따기는 글렀다. 용돈이라도 벌어보려던 꿈은 접어야겠다. 필경 연한 새 잎이 다 얼어버렸을 것이다. 높은 산은 여기보다도 훨씬 추우니까. 며칠있다 더 높은 산을 한번 뒤져봐야겠다. 다래순이라도 훑어와 묵나물을 만들어야지. 큰 재 너머 솔밭에 고사리도 많이 피니 그거라도 꺾으러 다녀야지.

문득 지난해 함께 도시락 싸들고 다래순 따러 간 교회 앞 성샌이 생각난다. 주먹밥 두 덩이와 단무지와 씨 없는 포도를 챙겨왔었지. 혈색 좋고 건강했는데 얼마 전 잠자다 숨을 거두었다. 올해는 누구와 숲으로 갈까.

산다는 것이 얄궂다. 하루하루가 이리 소란하고 복잡하다.

밭에 모종도 심고, 감자 싹도 푸릇푸릇하니 봄은 봄이다. 새데기가 알을 낳으니 봄은 봄이다. 그래도 어쩐지 봄 같지 않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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