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넷에 글로벌 스타로 부상한 배우 윤여정 님의 기사는 언제 봐도 기쁘고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브래드 피트보다 빛났던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 장면을 유튜브로 몇 번이나 돌려보고, 과거 예능방송 출연 장면도 일부러 다시보기 할 만큼.

스스로 생계형 배우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진솔한 내면을 발견하고, 초보 감독의 독립영화에 과감하게 출연하는 노장의 도전 정신에도 감탄사 연발이다. 옷은 또 얼마나 잘 입는지, 남들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소신이 패션에 투영되는 거라면, 나도 항공잠바를 사입어? 잠바라도 따라 입으면 뒤늦게 소신 비슷한 게 생길 것만 같다. 그런데 그녀의 센스있는 패션 기사를 보면서 오버랩 되는 얼굴이 있었으니, 바로 울엄마였다.

윤여정과 울엄마는 일단 나이가 비슷하고, 남편 없이 혼자 생계를 책임졌다는 공통점이 있다울엄마는 꽃다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평생 혼자 나를 키우셨다. 한때 온 동네가 인정하는 미모였다고, 귀가 아프게 하시던 말씀은 흑백사진의 희미한 전설로 남았을 뿐. 엄마의 몸은 서서히 바람이 빠지는 풍선처럼, 갈수록 홀쭉해지고 있다.

한때 물결치마를 즐겨 입었으며 서울 동대문까지 쇼핑 원정을 갔었다는 패션 피플, 엄마는 아파트 수선집의 단골고객이다. 유행이 한참 지난 옛날 옷을 꺼내놓고 원단이 아깝다는 말씀을 반복하시면 그 옷을 고쳐 입고 싶다는 뜻이다. “나이가 드니 몸이 자꾸 왜소해진다며 주로 바짓단이나 소매 길이를 손보신다. 어느덧 언니, 동생 사이로 발전한 수선집 사장님이 5백원씩 슬쩍 깎아주는 것도 엄마의 수선의지에 날개를 달았다.

헌데 옛날 옷을 줄이는 것도 한계에 이르자, 엄마는 내 옷을 수선해 입기 시작하셨다. “뒤에서 길이 좀 봐줄래?” 그녀가 단을 접어올린 청바지는 이미 천이 흐물거리는 상태였다. 옷 주인도 기억도 가물거리는 헌 청바지를 엄마는 어디서 찾아내셨을까. “니가 안입는 거 같더라, 떨어진 것도 아닌데 버리기도 아깝고

재인 초보엄마
재인 초보엄마

한날은 엄마의 옷장 문을 열었는데, 어깨심이 잔뜩 들어간 낡은 옷이 절반이고, 남은 절반은 내가 입던 옷들이었다.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엄마는 왜 내 옷을 말도 없이 이렇게 잘라놨어?” 하지만 엄마는 대수롭지 않은 척, “니가 안입고 처박아놨길래, 아이구, 화분에 물 줘야되겠네.” 심드렁한 대답이 엄마의 작전인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요새 코로나 땜에 시장도 자주 못가니까 옷을 더 못사겠더라, 전에는 장보러 가면 싸게 잘 골랐는데.” 어째 딸내미 심장에 불 지르는 말씀만 저리 골라하시는지.

번듯한 새 옷 좀 사입으시라고 돈을 드리면 백화점 파격세일 코너를 한참 뒤적이다 어느새 손주들 옷에 눈이 가 있는 엄마. “천조가리 하나에 비싸게도 받아먹는다. 몇 년 입고 빨고 하다보면 헌옷 되는데. 그래도 저거는 우리 손자가 입으면 한 인물 나겠구마는.”

내 휴대폰에 통화기록이 가장 많이 남는 이름도 울엄마다. 지금까지 최고 기록은 하루 12, 통화 내용은 종잡을 수 없다. “마트에서 냉동 조기 세일하는데 살까말까?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는데 열어볼까말까, 텔레비전에 의사가 무슨 오일이 좋다는데...저 늙은 배우는 목주름이 하나도 없네, 어디 가서 땡겼을꼬...” 서론도 본론도 결론도 없는 네버엔딩 스토리.

그럴 때마다 난 습관적으로 을 반복하다 전화를 끊는다. 더 물어보면 통화가 길어질 것을 짐작하고 일부러 다음 말을 참은 적도 있다. 엄마는 왜 맨날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관심이 많은지, 공감하지 못하고 대답하는 척만 한 적도 부지기수였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엄마 이름이 하루 12번이나 찍힌 통화기록을 보면서 아차 싶었다. 얼마나 대화가 고프고, 말상대가 그리웠으면. 남의 엄마가 오스카상 받은 건 역경을 이겨낸 삶이라고 박수치면서 정작 울엄마 외로운 건 외면하고 살았다.

그래서 요즘은 일 마치면 엄마한테 들러서 단 10분이라도 눈을 마주보고, 아무리 시시콜콜한 얘기라도 정성껏 듣는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세상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인생의 주인공이라면, 최고 조연상은 우리네 엄마들의 몫이 아닐까. 이제 울엄마의 인생에 내가 조연이 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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