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9시경, 나는 통영에서 진주로 오는 국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아니, 달리는 건 자동차였고,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으며, 혼자였다. 그리고 초보였다. 평소 자동차는 집과 일터를 오가는 출퇴근용이었고, 낯선 길은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진입하는 일이 없었다. 익숙한 길만 골라 다녔기 때문이다.

이 구간을 밤에 달려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취재차 통영에 들렀다 시간이 늦어졌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네비만 잘 따라가면 되겠지. 그러나 가로등이 대낮같은 통영 시내를 벗어나 캄캄한 국도로 진입했을 때야 알았다. 칠흑같은 어둠의 터널이 시작되었음을.

길에 가로등만 제대로 밝혀주신다면 다음 선거에 당신을 찍겠노라, 이름도 모르는 지자체장님에게 약속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자동차 헤드라이트마저 노안이 왔는지 가물거렸다. 허리를 앞으로 숙여 거북이처럼 목을 길게 빼고 유리창을 뚫을 기세로 앞을 노려보았다. 시력도 나쁘면서 안경을 쓰지 않겠다고 고집부린 것도 후회가 밀려왔다. 안경점에서 하나 맞추랄 때 맞추는 건데.

그러나 캄캄한 시야보다 더 난감했던 건, 도로에 다른 차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럼 더 편하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 그건 마치 망망대해에서 혼자 뗏목에 실려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설마 온 세상이 증발해버린 건가? 어이없는 망상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불빛이 반짝 했다. 한 줄기 등대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그 차는 순식간에 나를 추월해서 멀리 퇴장해 버렸다.

확성기가 있었다면 외쳤을 것이다. 제발 좀 같이 가자고. 하지만 이어서 나타난 다른 차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고속도로도 아니고 무슨 속도를 저렇게 내? 사실 그들이 빠른 게 아니었다. 내 차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을 뿐. 계기판이 시속 50km를 가리켰다.

재인 초보엄마
재인 초보엄마

그때 네비의 짠한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아차차, 진주로 빠져야 하는데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이 더 불어났다. 표백제를 통째로 들이부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할 수도, 라디오를 틀어볼 수도 없었다. 네비님의 지시를 한 글자라도 놓쳐선 국도에서 밤샘하는 사태가 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뒤통수를 스쳤다.

그렇다면 오늘 밤 내 운명의 수호신, 네비님께 모든 신경을 집중하리라. 오른쪽으로 가라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가라면 왼쪽으로,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 그 어둠 속에서도 한 바퀴 유턴하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그리고 닿은 곳은 길이 아니었다. 논바닥에 차를 멈추었다.

또다시 알았다. 네비는 신이 아니었음을. 믿었던 도끼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나니 오히려 정신이 차려졌다. 여기가 논인지 밭인지 몰라도 오늘 밤 나는 집에 가야한다. 차를 돌려 다시 도로 위로 접어들었다.

경로를 다시 설정합니다.” 평온한 목소리의 네비가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빙빙 돌아 목적지까지 도착 예정 시간은 한 시간 남짓,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차를 길에 버리고 싶었지만 계속 가야했다. 가야만 끝이 나니까.

예정시간을 한참 넘긴 11시쯤, 두 팔 벌려 활짝 웃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웰컴투 진주를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그제야 네비를 끄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장해서 앞으로 잔뜩 숙였던 허리도 뒤로 젖히고 의자에 등을 붙였다. 안방에 드러눕는 것처럼 편안했다.

이후 비루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나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의 무게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 그날 밤을 떠올린다. 저마다 인생길에는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야할 구간이 나타난다. 누구에게도 운전대를 넘길 수 없는 그 길에 섰다면, 주어진 길을 끝까지 한번 가보는 거다. 그럴 마음이라도 한번 먹어보는 거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또 다른 길을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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