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된서리가 내렸다. 서리는 나날이 두터워지고 있다. 이른 아침 밭에 나가니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삶의 막을 내린다. 내내 밭두렁을 뒤덮었던 호박넝쿨 속을 기웃거렸다. 올해 마지막 애호박을 대여섯 개 땄다. 산등성에 비친 아침 햇살이 빠른 속도로 내 발등을 지나 마을까지 밀려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햇살을 가득 담은 감국은 진한 향을 토해내고 개울가 느티나무가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어제 팥을 베어놓은 밭이랑에서 장끼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뒤따르던 꽃분이가 켕켕거리며 밭두렁 끝까지 뛰어간다. 장끼는 건너 굴참나무 뒤로 사라진다.

시각은 일곱 시 반을 넘겼다. 부산 사는 형이 일하는 아파트 경비원 교대시간이다.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넣었다. 요양병원 어머니는 여전하단다. 지난 주말 장조카가 병원에 찾아가 영상으로 모습을 확인했다고 한다. 팥 털고 마늘 양파 심어놓고 부산에 한번 내려가겠다고 전했다. 내년이면 아흔일곱, 다섯 해 째 요양병원 병상에 누운 어머니는 여태 그 모진 목숨줄을 부여잡고 계신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침 밥상머리가 소란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민박손님이 꽤 늘었다. 젊은이들이 많이 온다. 서하 또래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며칠째 머문다. 그 며칠 사이에 식구처럼 편안해졌다. 마루에 걸터앉아 장화를 벗고 바짓가랑이에 묻은 마른 풀잎을 터는데 아이가 다가와 응석을 부린다. ‘할아버지는 뭐해?’ ‘, 우리 지온이 잘 잤어?’ ‘, 잘 잤어.’ ‘, 밥 먹으러 들어가야지. 밖은 추워.’ 아이를 번쩍 들어 마루 위로 올렸다. 아이와 손을 잡고 들어가니 거실 식탁이 왁자하다. 작은방, 귀퉁이방 손님이 먼저 자리를 잡고 밥을 먹는다.

다들 이 바이러스 시대에 도시에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마스크를 쓰는 일상이 갑갑했을 것이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눈빛도 함부로 마주칠 수 없는 삶을 살면서 따뜻함이 많이 그리웠을 것이다. 엊그제 저녁엔 민박 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어우러져 고기를 구웠다. 바깥 탁자에 빙 둘러앉아 서로서로 통성명을 하고 요즘 많이 어렵지요?’ ‘다들 그러잖아요.’ ‘조금 견디면 좋아지겠죠?’ ‘그러게요. 그러겠죠.’ 술잔도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덥혀주었다.

아이구, 싸리버섯 국을 끓였네. 이거 추석 전에 내가 산에서 딴 싸리버섯인데. 귀한 버섯인데 국을 끓였네요. 많이들 드세요.” 식탁을 향해 부러 큰소리를 냈다. 달그락달그락 수저소리가 아름다웠다. 요즘 주말이면 보름이 카페는 하루 종일 손님이 들락거렸다. 민박손님 뒤치다꺼리를 끝낸 아내는 서하 돌보기로 한낮을 보낸다. 서하는 자꾸만 카페 일에 바쁜 제 어미를 찾는다. 평일 내내 어린이집 다니느라 엄마와 떨어져 살고 주말마저 또 이렇게 떨어져 지내는 서하가 안쓰럽게 보인다.

보름이는 보름이대로 휘근이는 휘근이대로 다들 열심히 산다. 장사라는 것이 그렇겠다싶다. 손님이 안 들면 안 드는 대로, 들면 드는 대로 어렵다. 주말이면 고구마 치즈케잌이 잘 팔려 밤늦도록 다음날 팔 케익 만드느라 보름이는 함께 저녁밥상에 앉지도 못한다. 카페며 살림집 청소하느라 휘근이는 함께 아침밥상에 앉지도 못한다.

카페 문을 연 지도 어느새 여섯 해가 되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산골마을 구석진 자리여서 곧 문을 닫겠지 싶었다.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은 날도 많았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도 문을 열었다. ‘오늘은 카페 문 열지 마. 이런 날씨에 무슨 손님이 있겠어.’ ‘아니에요. 문 열어놓고 놀지요. .’ 손님에겐 배례를, 음식엔 정성을 다해온 보름이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둘레길 여행자보다 자동차를 가지고 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더 늘었다. 서하 귀저기 값이라도 벌어보자고 시작한 카페였다. 나도 가끔 내려가 설거지라도 거들었는데 조그만 그릇세척기 들이고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고양이 보이던가요? 혹시라도 보이면 잘 좀 챙겨주세요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이런 문자가 와있었다. 주섬주섬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고양이 간식용 통조림 하나를 호주머니에 넣고 집을 둘러보았다. 뒷마당 창고와 대숲 속도 살폈다. 그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전날 저녁 어둠이 내렸을 때였다. 칠순 생일을 맞은 어머니와 함께 민박을 온 처자가 저녁에 실상사 앞길에서 고양이를 치었다며 전화를 해왔다. 울먹이며 심하게 떠는 목소리였다. 아직 살아있다고 했다. 종이상자라도 있으면 담아서 데려오라고 일러주었다. 고양이는 머리를 부딪친 듯했다. 이마에 작은 상처가 보였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사지는 멀쩡했다.

걱정 마요. 얘는 살겠네.” 몸조차 부들부들 떨고 있는 처자를 향해 고양이의 눈빛을 보여주었다. 칠순 어머니는 고양이를 살피는 내 등 뒤에서 부처님, 꼭 좀 살려주이소. 꼭 좀 살려주이소.’를 되뇌고 있었다. 상자에 뉘고 상자를 씌우고 두툼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다음날 아침 밖으로 나오자마자 고양이를 살폈다. 인기척에 칠순 어머니가 나와서 지켜보았다. 이불을 걷고 씌워둔 상자를 들추자 고양이는 쏜살같이 튀어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달렸다. 수돗가에 이르러 잠시 숨고르기를 하더니 사립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머리를 다쳐서인지 걸음걸이가 약간 비척거렸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고양이었다.

집 주변을 살펴봤는데 없네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호주머니에 고양이 간식용 캔 하나 넣고 다녀요.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줄려고요.’ 이렇게 답을 해주었다. 해가 뉘엿거릴 무렵 오래전 환경운동을 함께 해온 두 여성 활동가가 왔다. 내가 좋아한다는 홍어를 가져왔다. 아내는 돼지고기를 삶고 밤이 늦도록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다.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

환경연합은 잘 돌아가는지 몰라.’ ‘코로나 시대에 뭐 잘 되는 게 있겠어요?’ ‘그렇지. 활동하기가 쉽지 않겠지.’ ‘몇 개월 재택근무도 하고 그랬대요.’ ‘운동단체가 재택근무로 일이 되나?’ ‘그래도 다들 뭐 그리하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술도 어느새 거나해졌다. ‘사무총장도 선출하고 대표도 선출하는 핸데 아직 조용하네요.’ ‘그렇지? 이번엔 대표도 다섯 명 뽑지?’ ‘정관에 그리 되어있지요.’ ‘지역에서 활동해온 활동가출신 대표도 필요할 텐데.’ ‘그러게요. 오래 활동해온 사람들도 많아요.’

괜한 걱정을 하는 거나 아닌지 말을 할 때마다 스스로 흠칫흠칫했다. 이미 떠나고 잊은 지 오래 되었다고 여겼는데 옛 사람들을 만나니 그게 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저도 환경연합 그만 뒀어요.’ ‘아니, ?’ ‘그냥 그래요. 올해만 쉬고 아주 다른 일을 해보려고요.’ ‘그게 잘 되나. 오래 일했는데.’ 오랜만에 열 시가 넘도록 술을 마셨다. 가만히 누웠는데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내가 환경연합 대표를 지냈으니 환경연합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참 어리석은 게지. 내가 참 이기적인 게지.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