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큰일이네. 이제 어떻게 해요?” 마당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걱정스런 말투로 읍내 다녀오는 나를 맞았다. 군청과 농어촌공사 사무실과 농협을 다녀온 나의 어깨도 푹 쳐져있었다. “그러게, 어찌해 볼 도리가 없네. 다들 안 된다고만 하고.”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목돈을 장만할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지들을 생각해봤지만 요즘 세상에 돈을 꾸기가 그리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은 일찍이 하고 있었다. 필경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앞 언덕바지에 있는 농지를 판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육백예순 평쯤 되는 논이었다. 아내와 함께 그 논으로 갔다. 서너 해 묵혀둔 탓에 메마른 풀이 우거져 볼품없지만 산골 농지로는 제법 널따란 것이 잘 갈아엎기만 해도 쓸 만할 듯했다. 조그만 방죽도 하나 딸려 있고, 논둑에 서자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귀농 14년 만에 우리는 처음으로 이 농지를 구입하려 했다. 지난해 집을 고치느라 푼푼이 모아둔 돈을 다 썼지만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니 농지구입자금을 대출하는 정책이 있고, 그런 정책을 시행하는 지자체도 눈에 띄어 어떻게든 이뤄지리라는 기대에 일을 시작해버렸다.

논주인은 골목 평상에서 자주 만나는 유씨의 막내아들이었다. 이웃 아주머니가 다리를 놓아 흥정을 마치고 계약날짜를 정했다. 내가 믿은 건 군청이나 농어촌공사 장기저리 농지구입자금 융자였다. 농부가 농지를 사려는데 이런 정책이야 당연히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걱정 마소. 인터넷에서 봤잖아. 농지구입자금 융자해 주는 제도가 있었잖아.” 그래도 걱정스러워하는 아내를 달래고 읍내 가는 버스를 탔다. 지금은 이천 평에 조금 못 미치는 농지를 임대해 유기농소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지만 마침내 우리 농지를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농부로써 자기 농지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기운나고 멋진 일인가.

읍내로 나가는 내내 설레는 가슴 한편으로 지난날이 떠올랐다. 임대농으로 살아오며 겪은 서러운 장면들이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처럼 스산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서너 해 농사지어 땅이 폭신폭신하고 거무스름하게 좋아졌을 무렵에 밭주인은 그 밭을 뺏어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게 그 밭을 줘버렸다. 자기가 농사라도 지었으면 그나마 서러움이 덜했을 거건만 한동안 울화통이 터져 밭주인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한 마디 항의도 못해보고 나는 다른 농지를 찾아야 했다. 심지어는 밭을 빌어 퇴비 이백 포를 지게로 져 날랐는데 갑자기 안 빌려준다고 해 다시 그 퇴비를 지게로 지고 나온 적도 있었다. 이제 내 밭이 생긴다. 마음껏 퇴비를 넣어도 하나도 안 아까울 내 밭이 생긴다.

군청 농업기술센터를 들어서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담당공무원을 만났다. “우리 군에는 농지구입에 대한 보조나 지원제도가 없는데요. 시설보조나 농기계구입자금은 가능하고요.” 서너 쪽쯤 돼 보이는 문서를 들고 탁자에 마주 앉은 담당공무원의 대답은 이랬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지자체 정책에 농지구입자금도 융자나 대출이 된다고 해서 찾아왔다는 나의 말은 뜬구름 잡는 소리로 취급되었다. 농업기술센터를 나오는 내 발걸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농어촌공사 지부가 어디 있는지조차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농어촌공사지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

구입할 농지 지번을 찾아보니 생산관리지역이군요. 우리 공사에서는 이런 농지에 대해선 구입자금 대출을 해줄 수 없어요. 우리 공사는 절대농지, 경지정리 된 농지, 그런 농지에 대해서만 구입자금을 주선해 드려요.” 농어촌공사 직원의 답변은 이랬다. 내가 사는 곳은 산골이라 경지정리된 논은 구경할 수조차 없는데 우리 같은 소농은 어쩌란 말이냐는 항변도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처럼 무용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농협중앙회지점 대출창구를 찾았다. “구입할 농지의 감정가 최대 60%한도 내에서 대출을 해드릴 수는 있어요. 담보대출인 셈이죠. 그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지역농협 조합원이면 그 지역농협에 가서 대출을 받는 편이 훨씬 유리할 거라는 친절한 첨언을 들으며 나는 홀로 쓴 입맛을 다셔야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별다른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산 사는 형이 떠올랐지만 거기도 사는 형편이 어렵고, 진영에서 대농을 일구는 동서도 떠올랐지만 돈 이야기를 쉽게 꺼낼 처지가 아니었다. , 세상은 농부도 아니면서 농지를 사는 사람들이 많고 많은데, 그이들은 그 많은 돈 대출을 잘도 받는데 농부로써 농지를 사려는 내 신세는 이리도 처량한가. 전국 곳곳에선 개발예정지구 농지를 가지고 온통 투기난장판이 벌어지고 있건만 이런 볼썽사나운 패악질 속에서 정작 농민이 농지를 가지기가 그리 쉽지 않은 이 나라의 농정이 야속했다.

이제 어떡해?” “포기하든가, 아니면 마천농협이라도 찾아가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밖에.” “그럼 그렇게라도 해. 우리 논이 있어야지. 우리 논이.” 아내가 내 소매를 끌었다. 사실 이 논을 사자고 서두른 건 나보다 아내가 더했었다. 보름이와 휘근이가 시큰둥해할 때 어떻게든 먹고 살 만큼의 자기 논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애들을 설득한 것도 아내였다. 집이 아내 명의로 되어있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자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던 터였다. 아내가 앞장서 집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지역농협을 찾았다. 내가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어서 담보대출이 아니라 신용대출이 된다고 했다. 빚지고 살지 않아서인지 신용등급도 좋다고 했다. 꽤 높은 이율로 신용대출을 받았다. 그리고 어제 법무사 사무실에서 모든 계약을 마무리하고, 땅값을 건네고 비로소 나는 농지를 가진 농민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몇 번이고 매매계약서를 들여다보다 언덕바지 양지바른 곳에 엎드린 논을 찾았다. 메마른 풀이 숲을 이룬 묵정논이지만 사나흘 다듬으면 아름다운 농토로 거듭날 것이다. 저쪽 구석에 조그만 농기구보관창고도 하나 지어야지. 올해는 들깨와 콩을 심어야지. 눈부신 신록 너머로 해가 기우는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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