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세계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

해가 바뀌면서 아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더 이상 PC방에 가지 않는 것. 그렇다고 게임을 끊은 건 아니고 대신 집에서 한다. 우리 집 컴퓨터 사양이 PC방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뒤엔 대단한 결심이 있었다. 여기서 ‘결심’의 주체는 아들이 아닌 우리 부부. 우리는 냉장고 한 대와 맞먹는 비용을 지불하고 낡은 컴퓨터를 사이키 조명 번쩍거리는 최신형으로 바꾸었다.

툭하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버리는 컴퓨터를 새로 바꾸자는 요구는 사실 1년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귓등으로 흘리다가 실행하게 된 이유는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가면 PC방 가는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아들의 말에 나는 즉각 반응했다. 낼모레 고등학생이 될텐데 PC방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냉장고 값이 대수인가. 까이꺼, 아들이 공부를 한다는데! 의욕이 불타올랐다.

▲ 재인 초보엄마

그러나 여기서도 그 ‘의욕’의 주체가 ‘아들’이 아닌 ‘나’라는 점이 한계였다. 새 컴퓨터가 우리 집 거실에 휘황찬란한 불빛을 번쩍거리며 자리 잡은지 한 달 째. 세상만사 계획대로 되는 게 어디 있나. 이번에도 변수가 상수를 집어삼켰다. 무엇보다 게임 시간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자주, 손쉽게 게임을 하고 있으니. 나는 왜 몰랐을까. 방학동안 눈을 뜨면 컴퓨터가 보이고, 컴퓨터가 보이면 게임이 하고 싶어지고, 한번 접속하면 나가기란 냉동실에서 꽁꽁 얼어붙은 조기 한 마리를 상온에서 녹이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에는 주말에 7시간만 하기로 했던 게임시간이 평일 저녁까지도 물고 들어왔다. 약속한 시간이 됐으니 그만 하라고 하면 아들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친구들과 게임 도중에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그럼 우리가 한 약속은 뭐란 말인가. 집안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이 요즘 푹 빠져있는 게임은 ‘롤’이었다. 대한민국 남학생들의 수능 등급을 깎아먹는다는 마성의 게임. 롤은 4,5명이 팀을 이뤄 상대팀과 싸우는데, 게임에 접속하면 각자 헤드폰을 끼고 수시로 대화를 나눈다. 그래야 팀전이 가능하다. 그런데 아들은 수시로 흥분해서 괴성을 질러댔다. 게임 도중에 캐릭터가 공격을 받거나 아군이 죽었을 때, 고운 말로 ‘안타깝다’고 해주면 좋으련만. 지면 졌다고 꽥, 이기면 이겼다고 꽥. 온라인에선 짜릿함을 공유하는 방식일지 몰라도, 오프라인에 있는 나머지 가족들은 고역이었다.

그 와중에 얻은 것도 있었다. 시끄럽다고 눈총을 마구 쏘아대면서 컴퓨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 아들은 완전 수다쟁이였다. 게임 중간 쉬는 타임에도 쉴 새 없이 주절주절. ‘아까 학원에서 어떤 애가 이상한 말을 했는데... 유튜브에서 웃기는 걸 봤는데...’ 나랑 있을 땐 묻는 말에만 겨우 ‘예, 아니오’가 전부인데 친구들하고는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구나. 게임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현실에선 입을 다무는 건가? 어쨌든 다행이다 싶었다. 저것도 일종의 소통이니까,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겠지.

덕분에 아들이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는지도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어떤 농담을 하고 화가 나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아들에게 게임이 놀이이자 친교의 수단이라면 나에게는 녀석을 관찰하고 알아가는 또 다른 창(窓)이 되었다. 그리고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다. 게임의 세계란, 과연 어떻길래?

엄마도 롤을 해보겠다는 말에 아들은 화들짝 기뻐하며, 자신의 계정으로 접속해주었다. ‘이건 상대가 없이 연습용으로 AI랑 싸우는 건데, 초보자가 하기엔 가장 쉬워요. 오른손으로 마우스 왼쪽, 오른쪽 버튼 계속 누르시고~ 왼손은 자판에 QWER, 이 자리에 손가락 4개를 다 올리세요. 이게 공격 포인트인데...’ 양손이 바쁜 가운데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화면에는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온갖 캐릭터들이 날고 뛰고 기어다녔다. 캐릭터 종류가 무려 150개 이상. 그중 하나를 선택하면 걸맞는 공격 무기들이 뜨는데, 그것도 너무 많아서 언제 어떤 걸 써야할지 정신이 없었다. 이 판에서 고수가 되려면 엄청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겠구나.

‘팀전’도 중요했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같은 팀원이 위험에 처하면 달려가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등급이 올라가고 인정을 받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이러니 아이들이 빠져들 수밖에.

‘소환사의 협곡’에서 몇 번이나 죽었다 깨어나길 반복하는 사이, 한 시간이 금방 갔다. 얼결에 공격키를 눌러서 점수를 땄는데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들이 “야, 엄마 잘 한다~ 이제 다른 장소로 이동해보실래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벌써 다음 장소를 선택했다. “연습 더해서 실력이 쌓이면 다음에 우리 친구들이랑 팀전도 할 수 있어요. 우리 엄마라는 거 애들이 알면 완전 놀라겠지? 흐흐”

그날 이후, 롤에 다시 접속한 적은 없다. 그런데 아들의 게임시간이 걸어져도 초조해하던 마음이 전보다 덜한 것 같다. 막연한 불안이 조금 걷혔다고나 할까. 아들은 지금 친구들과 신나게 경험치를 획득하고 있다. 공부가 아니어도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많다는 걸 이해했으니. 이것으로 냉장고 한 대 값은 건졌다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려고 한다.

좌충우돌의 연속이던 아들의 중학교 생활도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중딩관찰기를 쓰면서 실제로 나는 아들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하고 발견할 수 있었다. 글감을 얻으려는 의도가 다분했으나 덕분에 녀석이 불쑥 던지는 ‘급식어’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하고 엄마로서 나의 허술함을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부족한 글에 지면을 허락해준 단디뉴스에 감사하며 새해 모든 분들이 각자의 세계에서 ‘레벨 업’ 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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