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또 봄나물을 캐러 나갔다. 봄나물이랬자 많이 커버린 쑥과 꽃대궁이 나올 것 같은 냉이와 아직은 어린 머위와 원추리가 전부였다. 아내의 봄나물 캐기는 용돈벌이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민박손님도 거의 끊겼고, 통장에 조금 남긴 돈으로 살아가면서 목욕비나 한의원 가는 비용이라도 벌어보자고 시작한 일이 봄나물 캐기였다.

서울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요청이 있었다. 봄나물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몇 있으니 캐서 보내달라는 거였다. 며칠 전부터 준비해오던 아내는 엊그제 처음으로 봄나물과 파김치를 담가 보냈다.

“내일 성안터에 머위나 뜯으러 갈까?” “그려. 아마 많이 컸을 기라.” 따사로운 햇살이 드는 이웃집 마당귀에 모여 앉은 영남아지매와 윤샌댁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임순네도 좋다며 설쳤다.

“성안터가 어디요? 거기 그리 머위가 많은가 보네?” 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머위를 캐러 간다는 말에 솔깃해서였다. “거기는 머위가 천지삐까리라. 머위가 벙벙해요.” “나도 따라갑시다.” “그러소. 남자가 하나 있어야 산돼지 안 무섭지.”

▲ 김석봉 농부

감자밭 이랑 만들고 비닐멀칭 해야 할 일이 산더미로 쌓였지만 다음날 아침 여덟시에 성안터 가는 길목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느 핸가 버섯을 따러 다니다 마을 뒷산 중턱 울창한 숲 속에서 묵정논을 만났는데 거기 다 자란 머위가 밭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가 성안터라고 했다. 거기라면 꽤 높고 먼 거리였다.

소나무숲 비탈길을 오르면서 세 번을 쉬었다. 영남아지매는 허리가 안 좋다고 했다. 거의 평생을 남원 목기공장에 다니다 지난해 그만둔 윤샌댁은 산을 오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그나마 임순네는 내 발걸음에 뒤처지지 않았다.

산중턱에 다다르자 제법 편평하고 널찍한 공간이 드러났다. 무너진 석축 곳곳에 제법 굵은 왕버들이 자라고 있었다. 묵정논이었다. 버드나무 아래로 푸릇푸릇 머위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임순네는 산언저리 쪽으로 붙었고, 나물 캐는 일이 서툰 윤샌댁은 엉거주춤 무너진 석축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이구야.” 위쪽으로 올라가던 영남아지매가 기겁하며 철푸덕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왜, 뭔 일이여.” 머위를 캐던 임순네가 영남아지매 쪽을 향해 외쳤다. 물기가 축축한 곳을 기웃거리던 나도 놀라 영남아지매께로 뛰어갔다.

“산돼지여. 산돼지.” 영남아지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여섯 걸음 앞에 산돼지가 흙을 파놓은 자국이 선명했다. 그렇게 가까이 산돼지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라며 몸을 떨었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묵정논 곳곳을 산돼지가 파헤쳐놓았다. 산돼지가 머위뿌리를 파먹는다고 했다. 산돼지가 설치고 지나간 자리엔 머위뿌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며칠 전 추위에 일찍 돋은 머위잎은 얼어 말라붙었고, 새로 돋은 머위잎은 고라니가 뜯어먹은 듯하고, 산돼지마저 머위뿌리를 파헤쳐놨으니 우리들의 머위 캐기는 사실상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풍 온 셈 치고 놀다갑시다.” 햇살이 잘 드는 편평한 곳에 내가 먼저 자리 잡고 가방을 풀었다. 빵과 사과와 소주 한 병과 제법 커다란 보온병에 담아온 식혜를 꺼냈다. 영남아지매는 어제 중국집에서 시켜먹고 남은 탕수육 몇 조각과 삶은 고구마를 싸왔다.

이른 점심나절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무릎이 조금씩 뜨끔거렸다. 엊그제 감자밭 밭갈이하느라 경운기 따라 다닌 뒤로 걸음이 불편하리만치 다리가 무거웠다.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하늘, 미세먼지가 지리산을 흐릿하게 만들어 놓았다.

빈 가방 메고 돌아가는 안타까운 마음에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직은 3월인데도 날씨가 더워 목덜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거무튀튀 때 묻은 마스크를 쓰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노라니 피시시 웃음이 났다. 여기는 바이러스도 없으니 산에 갈 때나 들일을 할 때는 마스크 안 써도 된다 해도 그들은 좀체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참 어려운 봄날이다. 산골에 사는 우리야 그럭저럭 견딘다지만 도시에서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웬만한 가게는 문을 닫았고, 문을 열었어도 문턱을 넘어오는 손님이 손에 꼽을 정도라 한다. 날품 팔 일거리도 없고, 무급휴직으로 집에 틀어박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디 대놓고 하소연할 곳도 없는 세상이라고 한다.

우리도 도시에서 살았더라면 필경 저런 꼴을 겪으며 한숨만 폭폭 내쉬고 앉았을 것이었다. 근근이 밥이나 먹고 버티기야 하겠지만 어떤 조그만 여유도 가질 수 없을 삶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나마 여기서는 빌린 밭이라도 있으니 땅을 일구고, 씨앗을 넣고, 먹을 것을 거둘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삶인가.

“벌써 왔네?” 라면을 끓이는데 밭에 나갔던 아내가 돌아왔다. “좀 뜯었어? 나는 밭에 부추 심고 왔지. 거기 농막 앞 밭 귀퉁이에 심어놨어.” 아내는 밭 귀퉁이에 조그만 부추밭을 따로 하나 만든다고 했다. “산돼지가 다 파헤쳐버리고 아직 철이 일러 머위도 별로 없드마.” “우리 먹을 것은 되겠네.” 현관 앞 가방 속에서 한 줌 머위잎을 꺼내는 아내는 그러나 아무렇지 않다는 말투였다. 어떻게든 아내의 봄나물 캐기를 돕고자 했던 나의 하루가 이렇게 시들었다.

“내일은 삼밭골 쪽으로 가볼까 싶어. 거기도 머위 많이 나잖아.” “그런 거는 내가 할 테니 감자밭이나 장만해요.” 라면에 청양고추를 썰어 넣으려는데 봉지가 비어있었다. 라면에 넣어 먹던 유부도 떨어진지 한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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