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를 이미 한 달 전에 콩 구워 먹은 중 3 아들에게 12월은 여백의 시간이다. 방학은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하고 교과 진도는 진즉에 나갔을 텐데. 학교에선 뭐하면서 시간을 보내나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도 녀석은 언제나처럼 불룩한 가방을 무겁게 지고 다녔다. 한날 열어보니 두꺼운 ‘수능 필살기 영어단어장’과 고등 수학 문제집, 보드게임 상자와 구겨진 안내장이 몇 장 끼어있었다.고등 수학 문제집은 학원 교재용이고 영어 단어장은 기말고사 마친 뒤 녀석의 요청으로 사 준 것이었다. 가격은 만 오천원. 근데 앞부분 서너 장 말고는 깨끗
선거가 끝나면, 방송사마다 재빨리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오차범위 플러스, 마이너스 5% 미만이라는 자막과 함께. 그날 자정 무렵이 되면 개표결과 ‘당선 유력’ 정도는 알 수 있는데 대개는 출구조사 결과가 적중하는 편이다. 하지만 다 믿을 순 없다. 정반대 결과가 나오면서 유권자들이 밤새 개표방송에 잠을 설치는 반전 드라마가 연출되기도 하니까.뜬금없이 출구조사 얘기를 꺼낸 이유는, 우리 집에서도 분기별로 두 번씩 출구조사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들의 시험 성적을 가늠하는 일. 보통 시험을 치른 당일 저녁엔 예상 점수가 거의 90
주말에 남해의 한 사찰에서 1박 2일 템플스테이를 했다. 중간고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중3 아들에게 약간의 쉼표를 주고 싶었다. 갱년기에 접어든 부부와 16살 사춘기 아들과 천진난만 10살 딸아이. 우리에게 배정된 방에는 이불과 베개가 4개씩, 그리고 지난 여름 부지런히 공덕을 쌓았을 선풍기 1대가 놓여있었다. 무엇보다 TV가 없다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템플스테이라면 이 정도 부재는 기본이지. 도착했을 때 스님이 일정표를 보여주시면서 되도록 묵언수행을 시도해보라고 하셨다. 사실 그 미션은 식은 죽 먹기였
이른 새벽, 잠을 깨니 빗소리가 들린다. 서늘해진 공기, 마당에 내려서니 빗방울이 무겁고 차갑다. 손전등을 켜고 뒷마당으로 가 한뎃잠을 자는 닭을 닭장 안으로 들였다. 비를 맞으면 저체온으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지난 여름 알 수 없을 동물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닭들이 물려 죽었는데 그날 이후 살아남은 닭들은 집에 들어가기를 꺼려 뒷마당 장작더미 위에서 한뎃잠을 잤다.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사방은 적막하고, 골목 가로등 불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나가자마자 빠르게 어둠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보였다. 따지
여든을 넘긴 김씨의 눈언저리가 축축이 젖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잘 익은 포도알갱이 몇 알을 손에 쥐어줄 때였다. 병상 침대걸이 탁자엔 우리가 가져간 요구르트와 바나나와 삶은 달걀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 빨대를 꽂아 요구르트를 입에 물릴 때도, 바나나를 까서 손에 쥐어줄 때도, 삶은 달걀을 까 소금에 찍어 건네줄 때도 무덤덤해하던 김씨였다.“영감 줄라고 아침에 마당가 포도나무에서 따 왔지.” 그의 아내가 건넨 그 포도 몇 알에 김씨는 마침내 울음보를 터뜨렸다. 함께 지켜보던 교회 앞 성샌이 고개를 돌리며 돌아서고, 평상 팔걸이를 잡
최근 벌어지고 있는 조국 대전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상실감의 과정을 거쳐 이제 각성의 단계에 이르렀다. 마치 높은 성(城) 안을 들여다본 느낌. 눈이 번쩍 뜨였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기득권의 성채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연대하며 살아왔는지, 역동적인 스토리는 드라마 ‘스카이 캐슬’ 이상이었고 스케일 또한 만리장성을 능가했다.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거니까. 인정하면서도 굳이 찾아낸, 그들과 나의 유일한 공통점은 본능에 충실하다는 점이었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던 좌파 지식인. 학벌과 집안배경, 독재에 저항한 소신, 심지어 외모까지 너무 완벽
방앗간 아주머니는 우리 고춧가루에서 단내가 난다고 했다. 잘 말라서 색깔도 곱다고 했다. 고추가 바뀔까봐 기계에 바짝 붙어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눈이 따갑고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가 났다. 백 근을 빻았다. 단내가 나고 색깔도 곱다는 고춧가루를 앞에 놓고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끔 고추밭을 둘러볼 때는 속상하고 부아가 났다. 고추가 익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주 찾아가서 살펴봐야할 고추밭이었건만 고추밭은 가기를 꺼렸다. 농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분무기 빌려 두 번 농약이라는 것을 뿌린 탓이었다.“고추에 탄저병이 생기는데......” 몇
날이 뿌옇게 밝아오는 시각, 벌떡 일어나 밥을 짓고 서하 먹을 국을 끓였다. 양파계란국이었다. 두부도 잘게 썰어넣었다. 아내는 정토회 모임으로 어젯밤 집을 비웠다.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는 소식에 밥상을 준비해두고 서둘러 밭으로 갔다. 김장 무씨를 뿌렸다.건너편 밭으로 가니 고라니가 그물망을 넘어뜨려 팥밭으로 들어간 듯했다. 군데군데 팥잎을 뜯어먹은 자국이 나있었다. 그물망을 손질하고 가을감자를 살폈다. 팔월 가뭄으로 가을감자가 이제야 싹을 피우고 있었다. 밭고랑 가득 자란 쇠비름과 바랭이를 뽑아냈다. 너무 늦게 자라는 감자가 걱정스
푹푹 찌는 날씨에도 PC방 순례를 빼먹지 않는 아들. 반팔 티셔츠에 긴 청바지를 입고 룰루랄라 집을 나서기 직전, 내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들아, 이 더위에 웬 청바지? 반바지 입어라. 보기만 해도 덥다.” 옷걸이에는 나실나실한 냉장고 반바지가 두 개나 걸려있었다. “하나도 안 더운데?” “안 덥기는. 청바지 뻣뻣한 걸 지금 뭐하러 꺼내서, 올 여름에 반바지를 두 개나 샀는데...” 잔소리가 길어질 걸 알아차린 녀석이 후다닥 뛰어나가며 한마디를 남겼다. “싫다고요, 반바지는 약해보인다고!”사실 요즘 아들의 가장 큰 고민은 ‘
아내는 며칠 전부터 들떠있었다. 아내가 제일 존경하는 스승께서 우리 집에 온다는 소식을 받은 뒤로 이것저것 챙기느라 잠자리에서도 뒤척거렸다. “우리 집 많이 불편한데 가까이에 있는 좋은 방 한 칸 잡아드리지.” “뭐 하룻밤인데. 우리 집에서 지내고 싶으신가봐.” “연세도 많은데 에어컨 빵빵하고 실내에 화장실 있는 방에 모셔야지.” “보름에게 양해 구하고 카페방을 내 드리려고.” 카페에 딸린 황토방이 한 칸 있는데 아내는 그 방을 쓰려는 생각이었다. 거긴 에어컨도 있고 화장실도 실내에 있으니 쓰기엔 편할 거였다.아내는 궁중음식연구원을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뒷마당 창고로 갔다. 다행이 그 닭은 살아있었다. 걸음마다 풀썩풀썩 주저앉긴 하지만 두 눈은 뜨고 있었고, 날갯죽지에 힘이 들어있었다. 나는 닭을 가만히 안아 닭장에 넣어주었다.닭장을 살펴보고 마당으로 나오니 바깥 탁자 아래 닭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간밤에 몰아친 비바람으로 온 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한 마리 한 마리 잡아 닭장에 넣어주었다. 암탉 일곱 마리에 수탉 한 마리, 암탉 한 마리가 모자랐다.비바람이 몰아친 지난밤이었다. 무심코 밖으로 나왔는데 뒷마당에서 닭들이 꼬꼬거렸다. 푸득이는 날
뉴스에서 자사고 재지정 평가 탈락에 관한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이 물었다. “엄마, 자사고가 뭐에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공부 잘 하는 애들이 가는 학교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근데 왜 평가를 해요?” “음, 그게 있잖아, 그러니까..” 헤매고 있을 때 아들이 또 물었다. “진주에도 자사고가 있어요?” “어? 진주에? 과학고 있지 않아?” “그건 특목고 아니에요?” 아, 그렇구나. 특목고는 자사고랑 다르지. 나는 서둘러 리모컨을 돌리는 것으로
서하의 말이 늘어간다. 엊그제만 해도 더듬더듬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하루하루 달라진다. “말도 안 된다. 흥!”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뒤 저녁밥상머리에서 이런저런 대화 끝에 서하가 불쑥 뱉은 말이다. 식구들이 빵 터졌다. 아내는 배를 잡고 뒹굴고 나도 입안 가득한 밥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보름이와 휘근이도 자지러졌다. 특히 ‘흥!’이라는 말을 하면서 보인 서하의 표정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어린이집에서 배워온 듯하다. 서하는 그렇게 무럭무럭 자란다.얼마 전 보름이와 휘근이 결혼기념일이었다. 벌써 여섯 해가 흘렀다. 예
어른 손바닥만 한 발자국을 남기고 산돼지가 처음으로 고구마밭을 다녀간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나눈 우리 가족들 대화는 이랬다. “큰일이네. 아직 뿌리도 안 달렸는데 벌써 산돼지가 다녀갔네.” “어디로 들어왔는데.” “호두나무가 있는 그 개울 쪽인 거 같아. 축대도 제법 높고 비탈이 심한데도 그리 올라온 것 같아.”“그러게 미리미리 그물망을 치라고 했잖아요.” “그물망을 치면 안 와요?” “그물망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냥 해보는 거겠지.” “그렇다고 두 손 놓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는 거잖아.” “얼마나 파 헤집었는데?” “이쪽 거
중간고사와 함께 봄이 가고 기말고사와 함께 여름이 왔다. 지금은 기말고사 기간. 아들은 스마트폰을 자진 반납했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스마트폰을 보지 않겠다는 갸륵한 마음에 나는 살짝 감동을 먹었다. 솔직히 나도 중독자였기 때문. ‘폰 좀 그만 보라’고 입만 열면 잔소리를 하면서도 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시시각각 올라오는 뉴스기사, 동영상들을 일일이 검색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어떤 시류에 뒤처질 것만 같은 압박감을 안고 산다.때문에 아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밀었을 때, 나 역시 거사를 앞둔
감자와 양파 주문이 전과 같지 않다. 그래도 내가 가꾼 감자와 양파는 우리 먹을 것만 남기고 다 팔리곤 했는데 올해는 주문량이 한참 못 미친다. 감자도 풍작이고 양파 값도 폭락했다는 뉴스 때문인가 보다. 팔리고 남는 것은 저온창고에 보관해야겠다며 아내는 저온창고에 양파 쌓을 자리 마련하느라 바쁘다.양파를 갈아엎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캐는 인건비조차 맞추기 어렵다고 한다. 양파상인이 함양군에 들어와 20kg들이 한 망을 오천오백 원에 흥정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는 만 원을 넘겼고, 지지난해는 만칠천 원까지 받았던 양파였다.감자 값
“나는 세상에서 장가를 참 잘 들었다싶은 사람 셋을 봤어요.” 이른 아침, 보름이가 현관을 들어서면서 아내를 바라보며 생글거렸다. “누구?” 서하 소풍간다고 달걀볶음밥과 잡채를 만드느라 부산한 아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보름이를 슬쩍 쳐다본다.“둥이네와 최 시인과 아버님요. 그 중 으뜸은 단연 아버님이구요.” “내 그럴 줄 알았다.” 나를 바라보며 계면쩍게 웃는 보름이를 마주보며 나도 웃었다. 살아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대개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였다. 내가 워낙 무뚝뚝하거니와 분위기 파악을 못해 생뚱한 말을 하기 일쑤이니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우리는 파이팅하는 이미지”. 강동현 씨-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저는 푸드트럭을 하다가 청년몰에 스테이크로 지원해 들어온 로드 카우 대표 강동현입니다.- 장사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장사를 시작한 지는 트럭까지 치면 거의 2년
일요일 늦은 아침,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아들이 외쳤다. “손들어, 꼼짝 마!” 나는 더욱 힘주어 그릇을 빠득빠득 씻으며 설거지를 계속 했다. “에이, 재미없어” 돌아서 가는 녀석. 기다란 잠옷가운을 바바리코트처럼 걸치고 손에는 장난감 총을 겨누고 다닌다. 아까 밥 먹을 때도 저걸 입고 미역국에 소매 단을 적시더니. 기분이 좋은지 노래도 흥얼거렸다.“모 아이 모 힝~ 삥슝 띡슝~” 영웅본색 주제가였다. 책장에 꽂혀있던 영웅본색 DVD를 우연히 본 뒤로, 녀석은 주윤발의 팬이 되었다. 나도 중학생 때 보고 반했던
나는 그가 너무나 미웠다. 그가 스쳐 지나기만해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듯했다. 저만치서 그가 오면 보란 듯이 고개를 홱 돌려 지나쳤고, 그 집 옆집에 볼일 보러 갈 때는 골목을 빙 둘러 다녔다. 그러기를 벌써 몇 해가 되었다. 한 마을에 살면서 이러기가 쉽지 않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꼴을 보기 싫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어쩌다 목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그이는 서울에 가서 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처가가 있는 이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도시에서 살다 들어왔으면서도 농사는 제법 하면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