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장의 서류가 너희 인생을 흔드는 일은 없었으면

기말고사를 이미 한 달 전에 콩 구워 먹은 중 3 아들에게 12월은 여백의 시간이다. 방학은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하고 교과 진도는 진즉에 나갔을 텐데. 학교에선 뭐하면서 시간을 보내나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도 녀석은 언제나처럼 불룩한 가방을 무겁게 지고 다녔다. 한날 열어보니 두꺼운 ‘수능 필살기 영어단어장’과 고등 수학 문제집, 보드게임 상자와 구겨진 안내장이 몇 장 끼어있었다.

고등 수학 문제집은 학원 교재용이고 영어 단어장은 기말고사 마친 뒤 녀석의 요청으로 사 준 것이었다. 가격은 만 오천원. 근데 앞부분 서너 장 말고는 깨끗했다. 보지도 않는 단어장은 왜 들고 다니냐고, 혹시 만 오천원짜리 아령이나 역기 같은 거냐고 묻고 싶은 걸 삼켰다.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공부는 안해도 들고 다녀야 안심이 되는, 일종의 부적 같은 용도가 아닐까. 그런 부적이 내게도 여러 권 있으니. 해가 가도록 읽지도 않고 쌓아둔 책들. 책꽂이에 꽂아만 놔도 흡족한 기분이 든다고, 차곡차곡 쌓아올린 핑계들이 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방 속에서 아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건 역시 보드게임. 친구들과 보드게임에 맛을 들였는지 아침마다 살뜰히 챙겨갔다. 그렇게 하루는 보드게임을 하고, 하루는 영화를 보고, 또 하루는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니, 엊그제는 도장을 찾았다.

▲ 재인 초보엄마

“엄마, 쌤이 도장 가져오래요”

“도장은 왜?”

“원서 쓴다고요”

좌충우돌 중학교 생활의 마무리 단계. 다음 목차는 ‘원서접수’였다. 반에는 특성화고나 특목고 등으로 이미 고교 진학이 결정된 아이들도 제법 많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일반고 진학 원서를 접수할 시즌이 온 것.

원서 접수에 앞서 아들이 가져온 안내장에는 진주시내 7개 일반고 이름들이 나열돼있었다. ‘1번부터 7번까지 희망하는 순서대로 번호를 적으시오.’ 아, 요즘은 이렇게 하는구나. 28년 전 그때는 연합고사를 쳤었는데. 솔직히 그때는 그 시험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그저 학교에서 시험 치라고 하니까 기계적으로 번호를 써내려갔을 뿐. 아들한테 나는 요즘도 철이 없다고 잔소리를 자주 하는데, 그 나이엔 철이 있기가 어려웠네, 지나고 보니까.

1번부터 7번까지 희망 학교의 순번을 적는 일은 쉽고도 어려웠다. 남편과 나는 우선, 식탁 가운데 놓인 안내장을 10초 정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어진 대화는, 누가 그러는데 그 학교는 어떻다더라. 딱히 근거 없는 소문들을 몇 마디 전한 뒤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제 볼펜을 잡아도 좋다는 암묵적 동의.

우리가 정한 1순위 기준은 ‘집밥’이었다. 집에서 여유 있게 아침밥을 먹고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최적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친구들이 많이 가는 곳이 좋다고 했다. 덕분에 1순위는 쉽게 풀렸다. 나름대로 명확한 기준이 있었으니까. 헌데 그 뒤부터는 안개 속이었다. 7번까지 순서를 어떻게 정한담? 그래서 떠오르는 이미지에 맡기기로 했다. ‘요즘 이 학교 출신들이 잘 나가던데? 그 학교는 위치나 주변 환경이 좀 산만해 보여.’ 그 와중에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글씨’였다. 왠지 이 글씨를 반듯하게 잘 써야 고등학교에 가서도 잘 할 것만 같았다. 획이 하나라도 비뚤어지지 않게, 한 글자씩 꾹꾹 눌러썼다. 손이 떨렸다.

신문과 방송에는 연일 입시 관련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앞으로 달라지는 수시와 정시 비중에 대한 심층 분석 기사들. 예비 고등학생의 엄마로서 나도 밑줄 쳐가면서 봤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어려웠다.

정부는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고교 서열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정시 비중을 높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정시 비중 확대는 서울지역 주요 대학 중심으로 하겠다니. 그럼 주요 대학에 포함되지 않는 나머지 대학들은 뭐란 말인가?

한편에선 지방 학생들에겐 수시가 유리하다는 분석도 있었다. 정시 확대 소식이 나오자마자 서울 대치동 집값이 올랐다고도 했다. 하지만 교육 정보나 스펙 쌓기에 투자할 인맥도, 시간도 없는 나같은 학부모 입장에선 수시나 정시나, 백구두나 흰구두나.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할 점은, 모든 중학생이 대학입시를 목표로 고교 원서를 작성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수시와 정시 논쟁이 뜨거울수록 소외되는 아이들이 있다는 점도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물론 이 모든 불만과 불안이 어리석은 나의 ‘기우’일지도 모른다. 당장 우리 아들도 그렇고 아들의 친구들도 12월의 널널한 시간을 즐기는 분위기다. 사실 그게 당연하고, 어쩌면 더 현명한 걸 수도 있다. 심각하면 지는 거니까. 이런 자유시간이 언제 또 올지 알아서. 다만 이 투명한 아이들이 단지 몇 가지 수치를 기준으로 갈림길 위에 놓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계절이 서른 바퀴쯤 돌고 돌아, 너희가 이 시간을 떠올리면 어떤 장면이 떠오를까. 진학 원서를 놓고 어디로 가는 것이 더 유리한지 고민했던 건 안중에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 몇 장의 서류가 너희들 인생을 흔드는 일은 더더욱 없었으면. 대신 한 겨울, 노란 햇살이 드는 교실에 둘러앉아 보드게임하면서 천진하게 웃던 그 장면이 사진처럼 저장되기를 바란다. 경쟁에 지치고 힘이 들 때, 다시 꺼내보며 웃을 수 있도록. 16살 너희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12월이 저물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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