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장을 침입한 너구리를 고민하다.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뒷마당 창고로 갔다. 다행이 그 닭은 살아있었다. 걸음마다 풀썩풀썩 주저앉긴 하지만 두 눈은 뜨고 있었고, 날갯죽지에 힘이 들어있었다. 나는 닭을 가만히 안아 닭장에 넣어주었다.

닭장을 살펴보고 마당으로 나오니 바깥 탁자 아래 닭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간밤에 몰아친 비바람으로 온 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한 마리 한 마리 잡아 닭장에 넣어주었다. 암탉 일곱 마리에 수탉 한 마리, 암탉 한 마리가 모자랐다.

비바람이 몰아친 지난밤이었다. 무심코 밖으로 나왔는데 뒷마당에서 닭들이 꼬꼬거렸다. 푸득이는 날갯짓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함께 사는 거위 덤벙이와 새댁이도 간간이 꽥꽥거렸다.

퍼뜩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손전등을 밝히고 뒷마당 닭장으로 향했다. 폭풍우가 거세지고 있었다. 호두나무 삭정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 김석봉 농부

닭장으로 불을 비추자 닭들이 닭장에서 그물망을 빠져나오려 머리를 내밀고 버둥거렸다. 순간 닭장을 빙 둘러 쳐놓은 그물망이 크게 출렁거렸다. 닭장 옆쪽에서 그물망을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이 보였고, 손전등을 비추자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너구리였다. 아뿔싸. 너구리가 닭장을 습격한 것이었다.

대밭 쪽 돌담을 넘으려는 너구리의 발버둥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녀석은 서너 발짝 앞에서 그물망을 뚫고 탈출해 대숲 속으로 사라졌다.

닭장을 찬찬히 살펴보는데 곳곳에 닭털이 수북했다. 한 마리는 돌담 아래 쓰러져있고, 세 마리는 그물망에 머리를 디밀고 있고, 수탉은 불안한 자세로 닭장을 바쁘게 드나들고 있었다. 암탉 네 마리가 사라진 상태였다. 닭들을 잡아 닭장 안에 넣고 문을 단단히 걸었다.

죽은 줄 알았던 쓰러진 닭은 온몸을 축 늘어뜨리면서도 가늘게 꼬꼬거렸다.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 쇼크 상태인 듯했다. 내일 아침이면 죽어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뒷마당 창고 안 종이상자에 넣어두었다.

“허 참. 닭장에 너구리가 들어왔네. 닭장이 엉망이야.” “닭은. 닭은 어찌되었어요.” 아내가 놀라 이부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났다. “수탉과 세 놈은 괜찮은 것 같아 닭장 안에 넣었고, 세 놈은 그물망을 빠져나와 도망을 간 것 같은데. 한 놈은 물렸는지 숨은 붙어있지만 가망이 없는 것 같아.”

“이를 어째. 그래 물린 닭은 어찌 했는데.” “창고 종이상자에 담아뒀지. 낼 아침에 봐서 죽었으면 묻어야지 뭐.” “또 안 올까?” “서너 발짝 앞에서 손전등 불빛을 봤으니 놀라 멀리 달아났겠지.” 후줄근히 젖은 몸을 닦는데 사는 것이 참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산골로 들어오고 난 뒤로 내가 감동한 몇 가지 일이 있었다. 계절마다 번갈아 피어나는 꽃들과 영롱한 별빛과 곱게 물드는 황혼에도 감동하고 살았지만 야생동물들을 만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귀농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건너편 산에 편백나무를 심는다며 벌목이 있었다. 다음해 벌목현장은 산나물이 지천이었다. 울창했던 숲을 거둬내자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무가 자리 잡기까지 몇 년을 봄이면 산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고사리와 취나물, 삿갓나물이 숲을 이룰 지경이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산나물을 뜯는 손길 앞에 오두카니 앉아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어린 산토끼를 만났다. 내 주먹만 한 크기였다. 내 손길이 귀를 스칠 때까지 녀석은 그대로 앉아 이 낯선 산짐승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마주보며 숨결을 나누었다.

밭 언저리 검불을 걷어내다 만난 꺼병이들과 가까운 어딘가에서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을 까투리. 골짜기를 빠르게 오르내리는 물총새의 그 황홀한 비행. 새벽마다 늙은 오동나무가지를 건반 삼아 두드리는 오색딱따구리. 두 마리 어린 것들을 데리고 고구마밭 이랑에 나타난 고라니.

서너 해 전 눈이 몹시 내린 추운 날이었다. 대밭 언저리에 너구리가 나타났었다. 너구리는 굼떴다. 늙었고 허기에 지친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두렁이와 이랑이가 맹렬히 짖어대도 꿈쩍하지 않았다. 개 사료와 이런저런 음식을 담아 녀석 근처에 놓아두었다. 녀석은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개울을 건너 숲으로 사라졌다.

그런 감동의 세월을 지나왔건만 살아갈수록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양파 캐낸 빈 밭에 팥을 심었는데 살아남은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싹이 트자마자 산비둘기가 파 헤집어버렸고,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고라니가 죄다 뜯어먹어버렸다. 때까치는 콩밭에서 살다시피 했고, 고라니는 열무, 얼갈이배추, 당근도 모자라 고춧잎과 고추가지까지 뜯어먹어치웠다. 산돼지는 고구마와 옥수수마저 풍비박산을 냈다.

배추흰나비가 날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비로소 벌레와의 전쟁을 치러야하기 때문이다. 열무밭에 기대어 알을 까고, 며칠 지나면 벌레가 창궐해 열무잎과 배추잎은 모기장처럼 변해버렸다. 양배추나 브로콜리는 아예 먹을 생각을 말아야했다.

산돼지 발자국은 증오의 대상이 되어갔다. 건너편 솔숲에서 들려오는 고라니 울음소리를 들으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콩밭에서 노닥거리는 때까치를 만나면 부아가 치밀었고, 팥밭을 쏘다니는 산비둘기를 보면 돌멩이를 집어 던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나비의 날갯짓에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못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밤, 닭장을 습격한 너구리를 만났다. 창고 벽에 걸린 쇠스랑이 보였다. 곁엔 괭이도 한 자루 기대있었다. 저것을 들고 다가가면 그물망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너구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였다.

그러나 내 마음이 아직은 거기까지 가있지 못했다. 너구리가 빨리 그물망을 빠져나갔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다시는 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닭이 살아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여섯 마리는 건졌네.” 집안으로 들어서자 아침밥상머리에 가족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한 마리는 아예 보이지 않고, 지금은 살아있어도 저 닭은 죽을 거 같아.” “너구리가 닭을 잡아먹어요?” “나도 몰라. 사료 훔쳐 먹으려 들어왔다 닭을 물어 죽이는 건지.”

“그나저나 오늘밤에 또 들어오면 어떡해?” “그물망을 더 단단히 얽어매야지.” “너구리 먹을 걸 바깥에 따로 놔주면 안 돼요?” “그럼 그럴까?” 풋 웃음이 났다. 식구들이 모두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제 너구리도 식구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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