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봉의 산촌일기] 나의 참스승은 아내가 아니었을까?

아내의 스승이 오는 날, 나의 스승이 누구인지 생각하다. 김석봉 농부l승인2019.08.06l수정2019.08.0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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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며칠 전부터 들떠있었다. 아내가 제일 존경하는 스승께서 우리 집에 온다는 소식을 받은 뒤로 이것저것 챙기느라 잠자리에서도 뒤척거렸다. “우리 집 많이 불편한데 가까이에 있는 좋은 방 한 칸 잡아드리지.” “뭐 하룻밤인데. 우리 집에서 지내고 싶으신가봐.” “연세도 많은데 에어컨 빵빵하고 실내에 화장실 있는 방에 모셔야지.” “보름에게 양해 구하고 카페방을 내 드리려고.” 카페에 딸린 황토방이 한 칸 있는데 아내는 그 방을 쓰려는 생각이었다. 거긴 에어컨도 있고 화장실도 실내에 있으니 쓰기엔 편할 거였다.

아내는 궁중음식연구원을 다니며 음식공부를 해왔다. 올해로 열여섯 해가 넘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인 한복려 원장을 스승으로 삼은 것을 늘 자랑으로 여겨온 아내였다. 연구원에 행사가 있거나 특별한 강좌라도 있으면 지리산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아내였다. 나는 종종 그런 아내가 못마땅했다. 많은 집안일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좀 누워있지.’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지만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는 음식 공부하는 서울 나들이마저 없으면 어찌 사느냐며 따졌다.

▲ 김석봉 농부

“내가 기미상궁 역을 맡았어.” 언젠가 서울을 다녀온 아내가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한 적이 있었다. “기미상궁이 뭐야?”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가는 음식을 맛보고 점검하는 사람이지.” “행사가 언젠데?” 내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있었다. 또 무슨 음식전시회나 시연회 행사가 잡힌 모양이었다. 이런 행사는 대개 사나흘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아내는 서울에서 찜질방 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런 행사기간에 예약된 민박손님이라도 있을라치면 건사는 내 몫이었다.

세상에 왕의 음식만한 음식이 어디 있겠는가. 아내는 우리 가족에게 자주 해주지는 않았지만 아주 가끔 왕의 음식을 해주었다. 연구원을 다녀온 날이면 그날 배운 음식을 소개하면서 언젠가는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그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재료비가 비싸기도 했고,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기도 했다. 왕의 음식은 맛이 없었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저 민숭민숭한 맛이었다. 그러나 그 음식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몸에 좋다는 선입견에서가 아니라 짜지 않은데 싱겁지도 않고, 맵지 않은데 매캐하고, 달지 않은데 단맛이 났다.

아내는 그런 이유를 들어 연구원을 다녔다. 한식의 근본은 궁중음식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의 음식공부는 열성적이었다. 거의 모든 모임과 강좌를 빠짐없이 다녔다. 아내는 연구원에서 공부하게 된 것을 스스로 고마워하며 살았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걱정이네.” 몇 년 전 아내는 ‘궁중음식체험지도사’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인자격시험이 아니라 연구원에서 부여하는 자격시험이었다. 연구원에서 이런 자격시험을 치루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시험이 어려운가?” “몰라. 처음으로 하는 거라서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모르겠어.” “당신은 안 빠지고 다녔잖아. 연구원에서 다 해본 거겠지 뭐.” 서른 명 남짓 합격자가 나왔는데 아내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궁중음식체험지도사’ 자격시험 합격증서를 들고 오던 날 보름이는 조촐한 축하자리를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쯤 되면 연구원 출입도 멈추련만 아내는 지금껏 발길을 이어왔다.

스승을 맞이하려 준비하는 아내의 상기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그런 아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음식 스승이니 맛있는 음식대접이 우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읍내 장에 나갔다. 어물전에서 문어를 사고, 채소전을 둘러보다 나물박을 샀다. 밭으로 나가 호박잎을 뜯어오고 흑돼지목살을 준비했다. “아버지. 어머니 생신선물이라 생각하고 원장님 오시면 의전을 확실히 해드리세요. 알았죠.”

보름이가 곁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며칠 전 아내의 생일에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내 모습이 떠올랐다. “뭘 어떻게 하라고.” “옷도 좀 갈아입으시고, 평상에 수라상도 펴두시고.” 갈아입은 옷이 흠뻑 젖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장작불 피워 돌판에 흑돼지목살을 구웠다. 유리창 안엔 환하게 불이 밝고, 아들내외와 아내와 아내의 스승이 모여 앉아 구운 돼지고기를 상추잎에 싸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저처럼 즐거워하는 아내를 본 기억이 없었다. 참된 스승을 모시는 일이 무척 즐거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스승은 누구인가.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오래도록 기념하고픈 스승을 두지 못한 채 살았던 것 같다. 농번기 가정실습 때 보리이삭 주워 보리쌀 가져오라던 초등학교 그 담임선생은 가난해서 보리쌀을 가져오지 못한 아이를 교실 밖으로 내쳤었지. 전자계산기 하나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 수 있건만 두터운 뿔테안경의 그 수학선생은 미적분 앞에서 내 자존심을 깨버렸지.

작업시간에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본다는 이유로 부산 학장동 신발공장 작업반장은 내 청춘의 가슴팍을 걷어찼고, 아카시 꽃향기에 취해 잠시 메모장을 펼쳤다는 이유로 선임하사는 나를 흙먼지 속에서 개처럼 끌고 다녔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는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좋은 세상 바라 함께 어깨 걸고 나가자던 사람들. 돈과 권력의 포로가 되어 배신의 칼을 휘두르던 그 언론인이 있었다. 그 성직자가 있었고, 그 작가가 있었고, 그 정치인이 있었다. 그 전문가가 있었고, 그 교육자가 있었고, 그 운동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익을 가늠하며 살았다. 그렇게 다들 욕망과 이익에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 또한 내 것으로 남을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살았다. 적은 월급에 투정을 부렸고, 이탈자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다 마침내 이 산골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나의 스승은 누구였나. 돈을 쌓아두면 구린내가 풍긴다며 평생 재산을 늘리지 않은 진주의 그 한약사였나. 온몸으로 휴전선을 넘으며 통일은 다됐다고 외치던 그 늙은 목사였나. 골프장에 맞서 삶터를 지키려 발버둥 치던 그 산골 노인네였나. 시뻘건 쇳덩이를 두들겨 낫날을 벼리던 그 시골장터 대장장이였나.

이 세상 곳곳에서 내로라하는 자리를 차지한 무수한 사람들이 있건만 내 삶의 앞뒤에서 밀거니 끌거니 해준 사람은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그러지 못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그런 인연 하나 만들지 못한 내 삶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냐. 마침내 벼랑 앞에 당도했을 때 꼭 한번 만나고 싶은 가슴속의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냐.

마당 건너 환하게 불을 밝힌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아내가 보였다. 오래전 어금니를 잃어 음푹 파인 볼에 잔주름이 잔뜩 고여 있었다. 그 잔주름처럼 늘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온 아내, 불현 듯 그런 아내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나를 이 자리에 이 모습으로 있게 해준 사람, 아들을 키우고 가정을 꾸려온 아내가 나의 참된 스승은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서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그동안 아내를 귀히 바라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런 생각에 젖어 아내를 바라보는데 가슴이 자꾸 쿵덕쿵덕 뛰었다.

흑돼지목살 한 점 구워 아내의 스승께 대접하는 내가 참 대견스럽게 여겨지는 저녁나절이었다. 시뻘건 불잉걸에 얼굴이 익을 지경이었다. 아내의 스승은 활짝 웃고 있었다.


김석봉 농부  ksb@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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