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종말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여든을 넘긴 김씨의 눈언저리가 축축이 젖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잘 익은 포도알갱이 몇 알을 손에 쥐어줄 때였다. 병상 침대걸이 탁자엔 우리가 가져간 요구르트와 바나나와 삶은 달걀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 빨대를 꽂아 요구르트를 입에 물릴 때도, 바나나를 까서 손에 쥐어줄 때도, 삶은 달걀을 까 소금에 찍어 건네줄 때도 무덤덤해하던 김씨였다.

“영감 줄라고 아침에 마당가 포도나무에서 따 왔지.” 그의 아내가 건넨 그 포도 몇 알에 김씨는 마침내 울음보를 터뜨렸다. 함께 지켜보던 교회 앞 성샌이 고개를 돌리며 돌아서고, 평상 팔걸이를 잡고 힘겹게 서있던 두부박샌댁이 덩달아 눈시울을 훔쳤다. 여름 한 철 백무동과 칠선계곡으로 청소 일을 다녀 얼굴이 검게 타버린 영종이형은 구부정한 허리를 더욱 굽혔다.

▲ 김석봉 농부

나는 간간이 비를 뿌리는 창밖 흐린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골목 평상에 모이는 이웃들이 김씨 병문안을 위해 산청요양병원을 찾아온 터였다. “석봉이 동생, 언제 김샌 입원한 산청 병원에 같이 한번 가보세.” 며칠 전 평상에 모여 노닥거리는 가운데 영종이형이 뜬금없이 김씨 병문안을 가고 싶어 했다. 영종이형과 김씨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다.

“그러게요. 한번 가긴 가봐야 하겠는데.” 말끝을 흐리며 마주 앉은 성샌을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 한번 가보세.” 성샌의 답이 돌아왔고, 이어 두부박샌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술한 다리가 안 좋아서...... 그래도 한번은 가봐야지.” 두부박샌댁이 어렵사리 동의했고, 늘 평상 끄트머리에 앉는 창원이형을 돌아보았다.

창원이형은 지팡이를 땅바닥에 탁탁 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젊은 시절 마천 석재공장에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는 사고를 당한 창원이형은 먼 거리로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김씨의 아내는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에 어찌할 바 없이 고마워하며 술상을 내왔다. “그래요. 그럼 추석 전에 한번 가보기로 하지요.”

“차를 몇 번 갈아타야 되지?” “아니요. 그냥 여기서 군내버스로 유림으로 가서 화계 택시로 산청요양병원으로 가는 편이 훨씬 빠르고 돈도 적게 들어요. 내가 계산해보니 영남아지매는 빼고 우리 넷이 각자가 이만오천 원씩만 내면 점심밥값까지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작전을 세워 나선 길이었다.

김씨는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감자밭 일을 거들다 맥없이 넘어져 대퇴부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김씨도 창원이형처럼 마천 석재공장을 다니다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을 못쓰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성한 다리 대퇴부 뼈가 부러져버린 거였다. 읍내 병원에서 수술 받고 두 달 넘게 입원해 있었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여서 회복은 어려울 거였다.

김씨의 아들딸은 마침내 산청의 요양병원으로 김씨를 옮겼다. 함양에는 요양병원도 없었고, 마침 산청에 새로 문을 연 시설 좋은 요양병원이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다. 김씨가 산청요양병원으로 들어간 지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요양병원은 규모가 컸다. 신축건물이어서 깨끗했다. 기다란 복도 끝 병실이 김씨가 입원한 병실이라고 했다. 앞장선 김씨의 아내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지난해 겨울 두 무릎을 수술한 두부박샌댁의 걸음걸이가 허청거려 보기에 안쓰러웠다. 허리가 안 좋다며 허리춤을 부여잡고 어기적거리며 걷는 영종이형은 요즘 부쩍 살이 많이 빠졌있었다. 교회 앞 성샌도 구부정하게 걷기는 마찬가지였다.

복도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병실은 문이 빼꼼히 열려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병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으나 8인실의 병실마다 여덟 명의 입원환자 명단표찰이 출입문 바깥에 걸려있었다. 거의 모든 병실이 만실이었다. “봐요. 봐. 누가 왔는지.”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김씨의 병상으로 달려간 그의 아내가 서둘러 병상등받이를 높혔다. 김씨의 상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뭔 꼴인고.” 또래의 성샌이 달려가 김씨의 손을 잡았다. “걷는 훈련은 하요. 그리 가만이 누워만 있으면 어찌 걸어 다니나.” 두 무릎을 수술한 두부박샌댁이 병상 손잡이에 몸을 기댄 채 혀를 찼다. 김씨가 평상을 떠난 지 석 달만의 해후였다. 김씨의 눈시울이 젖자 성샌도 두부박샌댁도 영종이형도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가져온 요구르트를 챙겨 냉장고에 넣었다.

건조한 표정의 간병사가 병상을 기웃거리며 이런저런 간섭을 해댔고, 김씨의 아내는 그런 간병사에게 요구르트 한 묶음과 바나나 몇 꼬투리와 포도 두 송이와 삶은 달걀 서너 개를 건네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부산 요양병원 어머니를 찾아뵐 때 내가 간병사에게 하는 모습이었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작별인사를 나누고 병원을 나섰다. 이제 영영 김씨는 걸어서 저 병원을 나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병원 앞마당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내내 모두들 말이 없었다. 성샌도 영종이형도 두부박샌댁도 머지않은 장래에 다가올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거였다.

휠체어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그 환자, 문병 내내 새우처럼 구부려 잠들어있던 옆 병상의 그 환자, 아무 말 없이 눈만 뜬 채 꿈벅꿈벅 바라보던 건너편 병상의 그 환자, 콧구멍에 호흡기를 달고 미동도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웠던 그 환자처럼 언젠가는 등 떠밀려 찾아와 누워야할 곳이 바로 여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의 종말이라고 별반 다르겠는가. 나도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 저 평상 이웃들처럼 요양원 침대위에 버려진 내 모습을 떠올렸다. 언젠가는 나도 달걀을 삶고, 홍시 몇 개 챙겨 아내가 누운 요양원을 찾아가게 될 거였다. “내가 아프면 생명연장하는 그런 거는 하지 마. 그냥 그대로 내버려둬요.” “내가 죽으면 그냥 높은 데서 휘휘 뿌려버려요. 묻지 말고.” 언젠가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가면 내 생각과 아내가 한 말을 적어서 유언장 같은 것을 만들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들 내외가 잘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말도 한마디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먼데서 택시가 병원 앞마당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는데 조금 심하게 무릎이 뜨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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