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농약 두 말이 내 밭에 뿌려진 사실을 용서할 수 없다”

방앗간 아주머니는 우리 고춧가루에서 단내가 난다고 했다. 잘 말라서 색깔도 곱다고 했다. 고추가 바뀔까봐 기계에 바짝 붙어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눈이 따갑고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가 났다. 백 근을 빻았다. 단내가 나고 색깔도 곱다는 고춧가루를 앞에 놓고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끔 고추밭을 둘러볼 때는 속상하고 부아가 났다. 고추가 익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주 찾아가서 살펴봐야할 고추밭이었건만 고추밭은 가기를 꺼렸다. 농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분무기 빌려 두 번 농약이라는 것을 뿌린 탓이었다.

“고추에 탄저병이 생기는데......” 몇 번이고 읍내 농약방 앞에서 주저주저하며 망설이다 마침내 문턱을 넘어섰다. “생전 농약은 안 사시드마. 고추농사는 농약 없인 안 돼요.” 농약방 주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어리석게 여기는 것 같았고, 실패한 사람을 얕잡아보는 것 같기도 했다. “작년에는 날씨가 도와서 병 하나 안 하고 고추도 많이 땄는데 올해는 고추도 푸른데 벌써 병이 오네요.” 한숨을 쉬었다. 죄를 짓는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 김석봉 농부

“이거는 탄저병 잡는 약이고, 이거는 벌거지 잡는 약이니 같이 쓰세요.” “벌레약은 필요 없고 그 탄저병약이나 주세요.” “벌레 생기기 시작하면 탄저병보다 더 심해요.” “그래도 탄저병 약만 주세요.” 주인은 물 한 말에 병뚜껑으로 한 뚜껑씩 타서 뿌리라고 했다. 그렇게 물 열 말을 뿌리라고 했다. 약물이 줄줄 흘러내리도록 뿌리라고 했다. 다시 사흘 뒤에 또 그렇게 한 번 더 뿌리라고 했다.

그날 나는 산그늘이 내리는 고추밭에서 분무기를 메고 다니며 농약이라는 것을 뿌렸다. 고추 천포기 심은 밭에 두 말을 뿌렸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서글펐다. 사흘 뒤에 또 두 말을 뿌렸다. “어떡해. 우리 이제.” “왜?” “지금까지 무농약 무비료로 농사지어 팔았는데......” 아내도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농약을 뿌리던 날 밭두렁에 쪼그려 앉아 하던 걱정이었다. 그동안 지켜온 원칙을 허물었으니 다른 어떤 것인들 믿어주겠느냐는 걱정이었다.

“솔직히 알릴 것은 알리고 팔아보지 뭐.” 내 목소리엔 그러나 힘이 빠져있었다. 뭔가 잘 안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엇이든 곧이듣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우리 누리집에 ‘고춧가루 판매’라는 광고문을 쓸 때였다. ‘탄저병 예방약 두 번 뿌렸습니다.’라고 썼는데 왠지 그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장 앞에 ‘어쩔 수 없어서’라는 수식어를 넣어보았다. 그래도 마음에 켕겼다. 다시 그 앞에 ‘올해는 날씨가 안 좋아’라는 설명을 덧붙여보았다. 문장은 점점 구차하게 변해갔다.

“올해는 날씨가 안 좋아 어쩔 수 없어 탄저병예방약 두 번 뿌렸습니다.” 문장을 완성해놓고 바라보는데 참으로 인생이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농사에 대한 의욕이 전과 같지 않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밭을 둘러보는 일도 전과 같지 않았다. 발걸음은 무거웠고 마음은 심드렁해졌다. 나름대로 원칙을 잘 지켜온 인생이라 여기며 살아왔었다. 양심과 정의를 잃은 삶은 얼마나 구차한가. 그런 삶은 살아있어도 죽은 거와 같다고 여기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옳지 않은 일을 숨겨주지 못한 삶이었다. 그름에 관용을 보여주지 않은 삶이었다.

“당신이 그러니 당신 가까이에 사람들이 없는 거야.” 내가 외로움을 타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아내는 이 말을 반복해왔다. 원칙을 지킨답시고 꼬장꼬장하게 살지는 않았으나 꽤 고지식해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그래, 이제는 융통성을 좀 가지고 살아야 해.’ ‘국회의원도 판검사도 법 어기며 잘들 살고 있잖아.’ 이런 생각을 해보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하다싶으면 다시 원칙으로 돌아서버리는 나는 여전히 케케묵은 원칙론자이거나 결벽증을 앓는 환자일 거였다.

나는 여전히 농약 두 말이 내 밭에 뿌려진 사실을 용서할 수 없다. 참 어렵고 갈길 먼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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