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차 없는 삶이 어디 있다고

선거가 끝나면, 방송사마다 재빨리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오차범위 플러스, 마이너스 5% 미만이라는 자막과 함께. 그날 자정 무렵이 되면 개표결과 ‘당선 유력’ 정도는 알 수 있는데 대개는 출구조사 결과가 적중하는 편이다. 하지만 다 믿을 순 없다. 정반대 결과가 나오면서 유권자들이 밤새 개표방송에 잠을 설치는 반전 드라마가 연출되기도 하니까.

뜬금없이 출구조사 얘기를 꺼낸 이유는, 우리 집에서도 분기별로 두 번씩 출구조사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들의 시험 성적을 가늠하는 일. 보통 시험을 치른 당일 저녁엔 예상 점수가 거의 90점대를 웃돈다. “엄마, 나 이번에 평균 90점 넘을 거 같은데? 와, 개오진다.” 처음엔 나도 덩달아 희망에 부풀었다. ‘진짜, 진짜?!’ 느낌표를 갖다 뿌리며. 그러나 오차 범위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게 되면서 즉각적인 반응을 되도록 자제하려고 노력 중이다.

엊그제 오후에도 전화가 왔다. 아들이다. “엄마, 나 도덕 8*점이요.” “그래? 도덕이 주관식이었나?” “응, 나는 간단하게 요점만 썼는데 자세히 써야 되는 거더라고. 그리고 참, 수학은 7*점.” 지난 주 치른 기말고사 성적을 불러주는 아들. 웬수같은 수학에 또 발목이 잡혔다. “괜찮아, 잘했구만, 뭘~”

▲ 재인 초보엄마

다음 날은 퇴근시간이 가까웠다. 시계를 보니 학원수업 직전인데 녀석이 또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사회 8*점” 이 과목은 출구조사 때는 100점이었다. 나는 무던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단전에서 올라오는 실망감을 감추기 위해 자연스럽게 화제 전환. “쌀쌀한데 잠바는 입고 갔어? 그래, 학원 수업 잘 받고~” 녀석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모양이다. “있잖아 엄마, 나 국어 100점이에요! 우리 반에 두 명 밖에 없어. 아, 지금 수업 시작한다. 나중에 봐요!” 이 말 하려고 전화를 안끊었구나. 어쩌면 아들은 100점을 받은 것보다 100점이라고 말하는 게 더 기뻤는지도 모르겠다. 점수 나올 때마다 이렇게 제깍 알려주는, 그 부담감의 진원지가 설마 나였을까. 스멀스멀 미안함이 올라왔다.

퇴근길에 약국에 들러 여드름 연고를 샀다. 아들이 거울 앞에서 투덜거리던 게 생각났다. 며칠 전부터 연고 사달라 했었는데. 아니, 벌써 몇 주가 지난 거 같기도 하고.

그날 저녁,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은 방에서 내내 스마트폰 삼매경이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말 붙일 타이밍을 찾다가 “아들! 연고 발라줄까? 여드름 연고 샀어.” 녀석이 반색하며 반듯하게 누워 이마를 보여준다. 나는 옆에 앉아 면봉에 흰 연고를 짜서 여드름 부위에 문질렀다. “이것도 유전인가? 엄마도 중학교 때 너랑 똑같이 이마에 여드름 났었는데.” “정말?” “응. 거울 볼 때마다 짜증내고 막.” “그때도 연고 발랐어요?” “좋다는 건 다 해봤지. 근데 사실 여드름은 시간이 지나야 낫더라고.” “그래도 지금 너무 보기 싫어요.” “그지. 그래서 젤 비싼 거 샀잖아. 약국에서 젤 좋은 거래.”

비싼 약값을 강조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난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어.” “어? 뭐라고?” “공부도 중간, 운동도 중간, 그렇다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다 중간이야. 뭐 하나 잘 하는 게 있어야지.”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고를 바르면서 대꾸했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잘 생겼는데. 공부도 그 정도면 잘하는 거야. 고등학교 가서 더 열심히 하면 되지.” “고등학교 영어랑 수학,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고등학교 가서 못하면 어떡하지...” 제 딴에는 중학교 마지막 시험이라고 열심히 준비했는데, 생각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아 속상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요즘 학원에서 미리 배우는 고등학교 공부가 중학교와는 차원이 달랐던 것. 아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지난 며칠간 성적이 나올 때마다 전화했던 것도 혹시 이 때문이었을까. 도덕, 수학 몇 점이 사실은 ‘나 불안하다’고 외치는 말이었을까.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흠뻑 기뻐해줄걸. 그때마다 바쁘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일부러 감정을 누르기도 했었다. 그저 성적을 더 끌어올리고 싶은 욕심에. “어려웠구나. 근데 고등학교 가서 막상 해보면 금방 적응될 거야. 껌이지, 껌. 너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애들도 처음엔 다 그럴 거야.” 부담을 줘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엄마도 처음이라 그랬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연고만 계속 문질렀다.

벌겋게 달아올랐던 여드름 부위 색깔이 조금 연해졌다. 오돌토돌 여드름이 불거진 이마에 연고가 스며드는 것처럼 아들의 마음에도 불안이 잦아들기를 바랐다. 그때까지 난 칭찬의 온도를 높여야지. 더 크게 응원해야지. 오차범위 따위 좀 안맞으면 어때. 세상에 오차 없는 삶이 어디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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