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열정이 스펙이 될 수 있기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조국 대전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상실감의 과정을 거쳐 이제 각성의 단계에 이르렀다. 마치 높은 성(城) 안을 들여다본 느낌. 눈이 번쩍 뜨였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기득권의 성채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연대하며 살아왔는지, 역동적인 스토리는 드라마 ‘스카이 캐슬’ 이상이었고 스케일 또한 만리장성을 능가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거니까. 인정하면서도 굳이 찾아낸, 그들과 나의 유일한 공통점은 본능에 충실하다는 점이었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던 좌파 지식인. 학벌과 집안배경, 독재에 저항한 소신, 심지어 외모까지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가 떨어졌던 그도 딸의 대학 입시 앞에서는 가진 걸(인맥이든 지위든) 아낌없이 쏟아 붓는 평범한 아버지였다.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세상 모든 부모의 본능 아닌가. 다만 진짜 ‘평범한’ 아버지들은 그의 광범위한 인맥을 따라갈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

살아있는 권력도 예외는 아니라며 칼을 뽑아든 검찰 역시 칼잡이 본능을 억제하기 힘들어 보였다. 헌데 그들이 서슬 퍼런 칼날을 치켜들고 한 일이 고작 한 여학생의 자소서 난도질이라니. 웬 오버 페이스? 하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소서든 생활기록부든 칼자루를 쥐었을 때 갈기갈기 찢어놔야 지금껏 누려온 권한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음을.

▲ 재인 초보엄마

이 문제를 최대한 자기 진영에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정치인들이나 간만에 촛불을 들고 나온 명문대 학생들도 크게 다를 바 없어보였다. 스펙관리 없이 그 자리까지 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좌우로 둘러쳐진 그들만의 성안에서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안면들이 아닐지. 차라리 ‘기득권 수호’라는 본능에 이끌려서 나왔다고 하는 편이 나을 뻔 했다. 그랬으면 ‘딱하다’는 말이라도 해줬을 텐데.

이 와중에 나의 본능은 이삭줍기에 눈길이 갔음도 고백한다. 그것도 아주 어설픈 방식으로. 소위 기득권층은 자녀를 대학 보낼 때 온갖 스펙을 동원한다는데. 아들에게 나는 뭘 해줄 수 있을까. 부끄럽지만 대학시절 교수님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교수님이 행여 질문 하실까봐 강의시간에 눈 마주치기를 극도로 경계했던 기억. 졸업 후 20년 가까이 연락 한번 안했던 처지에 이제 와서 교수님을 떠올린 것도 송구스러웠다.

그래도 잘 뒤져보면 관리할 스펙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지난 여름방학동안 아들은 무료급식소에 이틀간 봉사활동을 하고 봉사점수 8점을 받았다. 주말마다 PC방을 순례한 결과 근처 PC방의 음식메뉴와 컴퓨터 상태를 꿰고 있으며, 오카리나 연주에 재미가 들려 영웅본색 주제가 정도는 거뜬히 불 수 있다. 또 엊그제 비오는 날, 친구들과 가위바위보 해서 10초 동안 빗속에 서 있기 내기를 했다. 몸에 땀 냄새 나는 걸 아주 싫어해서 학교 마치면 바로 샤워를 하고, 학원가기 전, 옷에 방향제를 들이붓다시피 한다. 그러면서도 학원의 같은 반 여학생에게 관심이 1도 없음을 누누이 강조한다.

중 3 소년의 이토록 단조로운 일상. 내일 모레 고등학생이 된다 해도 해외 어학연수를 가거나 논문 제1저자가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스펙이 스며들 건덕지를 찾아야 하는데. “아들, 요즘은 대학갈 때 논문도 쓰고 에세이도 제출한대.” “뭐하게요?” “그걸로 점수를 준다는데? 만약 너라면 뭘 써보고 싶어?” “아, 엄마, 좋은 거 있어요!” 그리하여 지난 며칠간 아들은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진지한 표정이 설마 게임에 빠진 건가? 의심이 들 때쯤 눈이 아파서 더 못하겠다면서 아들이 보여준 화면.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총에 관한 일종의 분석자료 같은 거였다. 여러 총기의 사진을 올리고 사용법과 특성에 대한 설명을 달았다. 비슷해 보이는 총기 하나하나에 이런 차이가 있구나. 스마트폰 메모장 페이지가 130을 가리켰다.

“어때요, 엄마?” “와~ 사진을 일일이 다 붙였어? 대단하다~ 세상에 별의별 총이 다 있네?” 아들의 어깨가 올라갔다. 정식으로 PDF 파일을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이 사진들이 나중에 대학갈 때 스펙이 되진 못해도 지금의 열정을 쏟아 부울 무언가는 될 수 있겠지. 입시보다 긴 인생에서 너의 열정이 최강의 스펙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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