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두 얼굴의 엄마

일요일 늦은 아침,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아들이 외쳤다. “손들어, 꼼짝 마!” 나는 더욱 힘주어 그릇을 빠득빠득 씻으며 설거지를 계속 했다. “에이, 재미없어” 돌아서 가는 녀석. 기다란 잠옷가운을 바바리코트처럼 걸치고 손에는 장난감 총을 겨누고 다닌다. 아까 밥 먹을 때도 저걸 입고 미역국에 소매 단을 적시더니. 기분이 좋은지 노래도 흥얼거렸다.

“모 아이 모 힝~ 삥슝 띡슝~” 영웅본색 주제가였다. 책장에 꽂혀있던 영웅본색 DVD를 우연히 본 뒤로, 녀석은 주윤발의 팬이 되었다. 나도 중학생 때 보고 반했던 영화. 주윤발, 장국영의 매력에, 절묘한 음악도 세월을 뛰어넘는구나. 아들이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성냥개비 있어요?”

“성냥은 왜?”

“주윤발처럼 해보게요! 아, 지폐를 말아서 태워볼까?”

▲ 재인 초보엄마

아차, 눈총을 발사할 타이밍이다. 설거지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젠 그만하지. 오늘 도서관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들은 재빨리 방안으로 몸을 숨겼다. 어젠 하루 종일 PC방에서 놀고 오늘은 영웅본색 흉내라고? 지난 중간고사를 말아먹은 이후, 주말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겠다고 약속했던 아들은 어디 갔나.

“가방 챙겨라, 도서관 데려다 줄게”

“싫어요, 시험기간도 아닌데 왜?”

“공부는 평소에 하는 거야. 남들 놀 때 놀고 잘 때 자고 언제 따라 잡을 거야?”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눈치 빠른 딸이 옆에서 주섬주섬 간식을 챙기고 있었다.

“동생도 간대잖아. 엄마도 갈게.”

아들이 마지못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라 잃은 백성의 표정. 그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화가 솟구쳤다.

“넌 도대체 공부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성적을 올리고 싶으면 공부를 해야지. 너 이제 중3이야. 언제 정신 차릴래?”

말하면서도 ‘굳이 이런 말까지 해야 되나’ 싶었지만 순간 나도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몰라 얼른 차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에서 웬 남자가 뒷짐을 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옆집 아저씬지, 윗집 아저씬지 인사할 겨를도 없이 휙 지나쳤다. 어서 여길 벗어나야한다는 생각 뿐. 야수처럼 내지른 나의 괴성을 그가 전부 들었을 것만 같아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차안에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아이들이 내려왔다. 시동을 걸었다. 가는 동안 누구도 말이 없었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딸아이와 나는 어린이 열람실로, 아들은 남학생 열람실로 갈라졌다. 초등학생도 ‘필독도서 목록’이라는 게 있다. 딸이 목록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부지런히 책을 찾았다. 그렇게 2시간쯤 흘렀을까. 배가 고팠다. “우리 나가서 맛있는 거 사먹을까?”

아들은 어쩌고 있는지. 남학생 열람실 문밖을 기웃거리다 겨우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아들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나는 바람맞은 여자의 심정이 되어 터덜터덜 국숫집으로 향했다.

딸이랑 국수 두 그릇을 비우고, 찐만두를 포장해서 가져갔다. ‘도서관 휴게실에서 기다릴게.’ 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휴게실에는 중고등학생 대여섯 명이 음료수나 과자를 먹고 있었고, 어른들도 서너 명 신문을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아들이 오지 않을까봐 걱정이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애를 너무 잡았나? 제 딴에도 스트레스가 많을텐데. 만두를 좋아하는 딸은 아까부터 계속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엄마, 오빠가 안 오면 저 만두는 어떡하지?” “안 돼. 우리는 국수 먹었잖아. 이건 오빠 거야.”

주의를 주고 있을 때 녀석이 왔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만두를 다 먹어치웠다. 행여나 오빠가 하나쯤 남겨주지 않을까 기대하던 딸은 마지막 만두가 오빠 입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곤, 콜라를 뽑으러 갔다. “배 많이 고팠지. 도서관 자리 덥지 않아?” 말없이 고개를 젓는 아들. 동생이 내민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연다. “집에 가요. 샤워하고 싶어.”

우리는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모임에 갔던 남편도 와 있었다. 아들은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심상치 않은 공기를 감지한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침에 화냈던 일을 설명하려니 민망하기도 했다. TV에선 요란하게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봉준호 감독이 제 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이어지는 봉감독의 수상소감 “저는 12살의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길 마음먹었던 소심하고 어리석었던 영화광이었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어리숙하고 소심한 건 우리 아들이 일등이지. 기발하고 엉뚱하고 게다가 영웅본색에 빠져 살잖아. 그럼 장차 우리 아들도? 당장 아들을 크게 불렀다.

“봉준호 감독이 상 받았대!”

아들이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너도 영화감독하면 잘 어울릴 거 같아. 너 창의력이 엄청나잖아. 엄마가 인정하지!”

옆에서 듣고 있던 딸아이가 지나가듯 말했다.

“아까는 공부 안한다고 그리 썽을 내더니 이젠 창의력이 좋단다. 진짜 두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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