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목과 질시의 시선을 거두고

나는 그가 너무나 미웠다. 그가 스쳐 지나기만해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듯했다. 저만치서 그가 오면 보란 듯이 고개를 홱 돌려 지나쳤고, 그 집 옆집에 볼일 보러 갈 때는 골목을 빙 둘러 다녔다. 그러기를 벌써 몇 해가 되었다. 한 마을에 살면서 이러기가 쉽지 않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꼴을 보기 싫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어쩌다 목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그이는 서울에 가서 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처가가 있는 이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도시에서 살다 들어왔으면서도 농사는 제법 하면서 살았다. 어쩌다 들길에서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 어, 저, 저거......”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저녁시간 텃밭에서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던 아내가 갑자기 안절부절 말을 잇지 못했다.

▲ 김석봉 농부

아내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트럭이 멈춰 서 있었고, 트럭에서 내린 한 남자가 길 가 공터 나무더미에서 나무를 차에 싣는 것이었다. 간벌이 끝난 마을 뒷산에서 내가 지게로 져날라 쌓아둔 땔감나무였다. “거 뭐해요!” 마침내 아내는 고함을 내질렀다. 나무토막을 막 차에 얹을 때였다. 아내의 외침에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들었던 나무토막을 내려놓고 황급히 차에 올랐다. 나는 바삐 뛰어나가 길목을 막았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나무가 하도 매끈하게 잘 생겨서 한번 만져본 것인데......” 차창 속에서 말을 더듬거리는 그를 나는 지금껏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나는 그가 몹시 미웠다. 대밭머리 붉은 양철지붕 집 앞집에 사는 그는 주는 것도 없이 미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웃들과 안 싸워본 집이 없다고 했다. 돌담 아랫집은 측량하다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뒤로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등 돌리고 지낸다고 했다.

내가 빌린 밭 아래쪽에 그이의 밭이 있었다. 그 밭에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실랑이가 있었다. 밤새 비가 내렸고, 이른 아침 밭을 둘러보러 나갔다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밭 물꼬를 막아놓은 것이었다. 물이 내려가지 못해 고추밭이랑에 가득 차있었다. 아래쪽 밭주인인 그이의 짓이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게 이치라면서 다시 물꼬를 팠으나 비만 내리면 몰래 다시 물꼬를 막아버리곤 하는 거였다.

그러다 내가 마을일을 할 때였다. 문득 그이가 찾아왔었다. “김 주사, 이거 토종꿀인데 한번 먹어 보시게.” 불쑥 작은 꿀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내가양봉을 조금 받아서 토봉 벌통에서 키우는데 이번에 꿀을 좀 떴네.” 그의 설명이 뒤따랐다. 전국적으로 토봉이 몰살되어 토종꿀은 구할 수 없을 때였다.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데 듣는 말마다 께름칙했다.

“이거 좀 팔아주게. 오만오천 원. 오천 원은 자네가 먹고......” “그럴 필요는 없고, 가져온 것 두고 가세요. 오만 원에 팔아볼게요.” 마을일을 하자니 개인감정으로 그이를 대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꿀을 받아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꿀은 생각보다 잘 팔렸다. 토종꿀을 구할 수 없던 시절이라 토봉 벌통에 키웠다는 것만으로도 인기가 있었다. 그이는 계속 꿀병을 가져왔고, 나는 계속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정말 이 사람이 벌을 잘 키우나?’는 생각이 들어 벌통을 놓아두었다는 언덕바지 숲 언저리로 가보았다. 여기저기 예닐곱 개의 토종벌통이 놓여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벌통은 말이 아니었다. 대추벌이 와서 꿀벌을 죽여 벌통 앞은 온통 죽은 꿀벌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벌통 주변은 대추벌이 차지했고, 구석진 곳에 놓아둔 벌통 두어 곳에 간간이 꿀벌이 드나들 뿐이었다. 양봉꿀은 한 병에 이삼만 원, 그 꿀을 사와 내게 가져다준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는 그이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는 그 아주머니가 너무나 미웠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 잡은 그 아주머니 집 앞을 지나올 때면 혹시라도 마주칠까봐 발끝만 보면서 바삐 걸었다. 문간에 조그마한 강아지 한 마리가 묶여 있는데 그 강아지마저 보기 싫었다. 밭에 나가는 길에 어쩌다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호들갑스럽게 말을 붙여 왔다. 내가 가진 미워하는 감정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잡다한 이야기를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말끝마다 빈정대는 투로 말을 받았으나 그 아주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안하네만 내년부턴 저 밭을 우리가 지어야겠네.” 여기 들어오고 다음 해부터 그 아주머니네 농토를 빌려 농사를 하기 시작했었다. 무농약 무비료로 퇴비만 엄청 뿌려가면서 몇 해 농사를 지었다. 흙의 색깔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지렁이와 두더지 천국이 되어갈 즈음 자기네가 농사를 지어야겠다며 밭을 내놓으라는 거였다. 아쉽고,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가 가꾸어놓은 그 밭을 우리에게서 뺏어 다른 이웃에게 넘겨주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원주민의 심술과 괄시에 분노가 차올랐고, 미워하는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저 밭 농사 지어볼란가.” 지난해 겨울, 고추 심을 밭이라도 조금 늘여볼 요량으로 몇 이웃들께 넌지시 말을 꺼냈는데 대뜸 그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어떤 밭을요?” 그 아주머니가 농사짓는 밭이 여기저기 조금씩 흩어져 있었다. “전에 농사짓던 그 밭하고, 그 위쪽에 따로 떨어져있는 두 뙈기 다. 합하면 엿 마지기는 되지.” “또 그 밭을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껏 가꾸어놓은 밭을 뺏어 다른 사람께 주더니 다시 돌려준다는 거였다. 부아가 치밀었다. 뭐 이런 사람이 있나싶었다. 들길에서 만나더라도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평상에 나타나면 내가 먼저 자리를 떠나버리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살아갈수록 마을엔 미워해야할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농사지을 땅을 찾고 있을 때였다. 한 이웃 아주머니는 가는골 서 마지기 논을 빌려 쓰라고 했다. 밭으로 써도 괜찮다고 했다. 우거진 덤불을 걷어내고 퇴비를 백 포 넘게 져날랐다. 밭갈이를 준비하려는데 느닷없이 그 논을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해 봄날 나는 땀을 뻘뻘 쏟으며 그 백 포 넘는 퇴비를 다시 지고 나와야 했다.

마을회관 근처에 사는 그 술고래 김샌은 고사리를 팔아달라며 다짜고짜 고사리 부대를 던져두고 가버렸다. 열 근이라 했다. 한 근에 사만 원은 받아야 한다면서 삼만오천 원에 준다고 했다. 열 근 팔면 오만 원 벌이는 된다는 말에 힘을 주었다. 고사리가 잘 팔릴 턱이 있나. 스무날이 지나 서너 근 팔고 남은 고사리 부대를 돌려주었더니 한 근이 빈다며 우겨댔고, 나는 한 근 값을 물어주어야 했다.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려니 하며 살았었다. 내가 사랑하고 미워한 만큼 사랑받고 미움 받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려니 하며 살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인생이 살아갈수록 미워하는 감정만 쌓이는 것 같고, 미워해야할 사람만 늘어나는 것 같다.

내가 살아온 날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준 날들이 생각난다. 내 삶의 지침에 새겨둔 정의와 정직으로 인해 상처 받고 돌아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문득 나를 사랑한 사람보다 나를 미워하며 돌아선 사람들이 백배 천배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시절, 내가 정한 내 삶의 원칙은 얼마나 자위적이었던가. 테두리를 긋고, 그 완고한 테두리 속에서 거들먹거리며 평가하고, 징계하고, 배척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독하게 반목과 질시의 시선을 던져주었던 것처럼 등 뒤에서 입술 잘근잘근 씹으며 나를 증오하며 미워했을 사람들이 생각난다.

어찌 몰랐겠는가. 그때라고 그런 느낌을 어찌 못 받았겠는가. 조직을 위해서라고, 내게 부여된 지위와 권한 때문이었다고, 그래야 좋은 세상이 온다고 쓰디쓴 침을 꿀꺽꿀꺽 삼켜가며 테두리 밖으로 찍어낸 사람들의 그 원망을 어찌 듣지 못했겠는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창에서 용서를 빌던 내 모습이 정말 거짓과 위선이었겠는가.

돌아보면 다 제자리에 있는 것을. 거기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다들 한 테두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비가 내리니 오늘은 마을을 한 바퀴 휘 돌아다녀야겠다. 어쩌다 그이를 만나거나, 그 아주머니를 만나거나, 술고래 김샌을 만나면 슬쩍 웃으며 인사를 건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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