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가 너무나 미웠다. 그가 스쳐 지나기만해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듯했다. 저만치서 그가 오면 보란 듯이 고개를 홱 돌려 지나쳤고, 그 집 옆집에 볼일 보러 갈 때는 골목을 빙 둘러 다녔다. 그러기를 벌써 몇 해가 되었다. 한 마을에 살면서 이러기가 쉽지 않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꼴을 보기 싫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어쩌다 목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그이는 서울에 가서 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처가가 있는 이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도시에서 살다 들어왔으면서도 농사는 제법 하면서 살았다.
문득 일상이 힘겨워진다면 진주시 이반성면에 있는 경남수목원을 찾자. 누구라도 기꺼이 품에 안는 경남수목원에서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숨을 고를 수 있다. 진주와 창원의 경계 근처인 수목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초록빛 싱그러움이 밀려온다. 수목원 입구를 지나면 산림박물관이 저만치에서 어서 오라고 알은체를 한다. 박물관에 들러 산과 나무에 관한 이해를 돕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그저 위안받고 싶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소나무 아래 들국화를 닮은 샤스타테이지 꽃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반긴다. 꽃을 지나면 하얀 빙수를 닮은 이팝나무들
봄을 빛내는 존재는 단연 꽃입니다. 봄이 농익어가는 요즘, 새빨간 꽃양귀비의 유혹에 꽃길만 걸을 수 있는 축제가 있습니다. 5월 17일부터 26일까지 하동군 북천면 일대에서 열리는 제5회 꽃양귀비 축제가 그곳입니다. 연둣빛이 초록으로 짙어지는 요즘, 들녘마다 붉은 기운으로 가득한 북천면. 진주에서 하동 북천에 들어서는 입구부터 붉은 기운이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하동 북천 꽃양귀비 축제장하동 꽃양귀비 축제는 올해로 다섯 번째입니다. 북천 일대 들판 25만㎡가 꽃양귀비 천지입니다. 꽃대궐입니다. 지역민들이 생산한 각종 농산물과 공산
파랑새가 왔다. 여름 철새인 파랑새는 4월말이면 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녀석들의 짹짹거리는 소리가 봄 하늘을 가득 채운다. 우리 마을이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았고, 고목들이 많아 서식환경이 좋은 것 같다. 나뭇잎이 무성해지면 샛노란 깃털로 치장한 꾀꼬리가 찾아오고, 다랑이논에 물을 잡기 시작하면 왜가리와 쇠백로도 나타나 그 좋은 경치에 화룡정점을 찍어준다.이 산골에 들어와 처음으로 파랑새를 보았었다. 조그맣고 예쁘장하고 유순할 것 같았던 파랑새에 대한 상상은 그러나 무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파랑새는 거칠었다. 사나웠고, 비둘기만한
1년에 10시간~15시간, 아들은 봉사활동을 한다.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거나 관공서 등지에서 잡다한 심부름을 하고 도장을 받는데, 그 봉사점수가 내신에도 반영된다. 따라서 정확한 시간 확인이 필수. 이쯤 되면 말이 봉사활동이지 일종의 비즈니스 활동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처음엔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던 녀석도 3년쯤 하다 보니 이력이 붙었는지,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장소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점수 따기 용이라도 기왕이면 좀 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 좋을 텐데. 덩달아 나도 사방으로 레이더를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중앙시장의 큰길을 따라 걷다 꿀빵 가게 앞에서 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어둑한 공간을 하나 마주하게 된다.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이곳은 새벽에 수산시장이 열리는 장소이다. 낮에는 마치 잠자듯 조용하지만, 오전 1시쯤 되면 활기를 띤다. 야트막한
올해 봄은 더 힘들었다. 농토가 많이 늘기도 했지만 봄나물 뜯는다고 산에도 자주 다녔다. 얼굴엔 가시덤불 헤집고 다니다 긁힌 자국이 선명하다. 겨우내 볼록하게 나왔던 아랫배가 쑥 들어갔다.어제는 다래순을 따러 갔었다. 봄철 숲에서 채취하는 나물 중 최고로 치는 것이 다래순이었다. 평상에 모이는 성샌과 영남아지매가 내 뒤를 따랐다. 젊은 시절 산을 자기네 안방 드나들 듯 했을 이 두 이웃은 그러나 이제 많이 늙어있었다. 산을 다녀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무릎도 허리도 좋지 않다면서도 내 뒤를 졸졸 잘 따라다녔다.여느 봄나물이
주변 이들에게 자주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나 있잖아. 십대 후반, 이십대 때, 삼십 너머 삶이 있다고 생각을 안했던 것 같아. 사람의 삶으로 생각이 안 들었어.“ 이런 생각이나 느낌 공감될 것이다.장 마실 나들이는, 예상치 않았지만 그 늙음과 직면하는 것이다.날은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 세월호 참사 5년 행사가 있어 마실 나들이를 잠시 망설였지만 모임 대표라는 책임이 앞섰고 가까운 곳이라 무겁지 않게 나섰다. 사월의 목적지는 진주시 (일)반성 장이다. 반성 장은 진주에서 면단위에서 서는 장 가운데는 가장 큰 장이다. 그리고 내
“요즘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밥 먹다 말고 아들이 툭 던진 한마디에 나는 잠시 숟가락질을 멈췄다. 놀라거나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저 말의 배경이 짐작되었기 때문. 그 사이 머릿속에선 5G 속도로 계산기가 돌아갔다. 남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아빠도 그렇다.” 이런. 선수를 빼앗겼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남편의 얼굴에선 불경기의 여파를 감내하는 가장의 책임감이 무겁게 배어났다. 아빠의 속뜻을 백분의 일이라도 알 턱이 없는 아들은 이내 생글생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빠도 그래요? 나랑 똑같네! 그럼 우리 같이 게임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남다른 한복을 만드는 계기? 발품 파는 게 최선한복들이 멋스럽게 전시된 거리를 지나 명신주단이라고 적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 한복집이라 생각하면 여 사장님을 예상하는데 푸근한 웃음으로 남자 사장님께서 반겨주신다. “반갑습니다, 어서오세요” 정
아침 이른 시간부터 대밭 아래 노샌댁에서 쿠릉쿠릉 포클레인 소리가 요란했다. 무슨 일인가고 달려가니 새 집을 짓는다며 살던 집을 허물고 있었다. 홀로 사는 옛 집이니 볼품이야 없었지만 늦가을 처마아래 곶감을 주렁주렁 걸어놓으면 가장 폼 나는 집이기도 했다. 포클레인 삽날이 아직 지붕까지 쓰러뜨리지는 않았고 작업하기 좋으라고 주변을 정리하는 중이었다.내 눈길은 방문에서 멎었다. 아직은 쓸 만한 문짝이 그대로 달려있었다. “아니, 저 방문은 어쩌려고요.” “방문은 왜요? 그냥 치우려는 참인데.” 건축업자가 팔짱을 낀 채 작업하는 포클레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매 줌치 장도칼(장독간),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157년 전 진주농민항쟁 때 백성들이 부른 우리나라 최초 혁명 가요다. 이 노래는 2년 뒤 동학농민항쟁 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로 이어졌다.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의 흔적을 따라 나섰다.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를 찾아 진주시 수곡면으로 향했다. 찾아가는 아침, 진양호는 안개를 얕은 이불인 양 덮고
5년 전 4월 16일.그리고 해마다 다가오는 그 날.깊은 슬픔으로 각인되어버린 안타까운 날이다.슬픔이란 건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기 어렵다. 다만 살면서 조금씩 무디어질 뿐이지만...슬플때는 한없이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슬픔은 슬픔으로 치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오랜만에 비탈리의 샤콘느 음반을 꺼냈다.도입부부터 흘러 나오는 장중한 오케스트라 그리고 이어 나오는 애절한 바이올린의 울림.이것 하나만으로도 슬픔은 위로가 될 수 있다.많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샤콘느를 연주했지만 프랑스 출신의 지노 프란체
눈물마저 죄가 되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 제주 4.3의 흔적을 찾아 4월 2일부터 4일까지 다녀온 역사탐방을 3회에 걸쳐 나눠 적는다. 역사탐방은 제주도 초청으로 경남을 비롯한 전국 14개 시도 파워블로거와 SNS기자단, 공무원 90여 명의 에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명예기자 자격으로 다녀왔다. 팸투어 이야기를 3회로 나눠쓴다.글 싣는 순서1. 섬뜩한 진실과 마주하는 제주 4.3기념관(클릭)2. 꽃 피워라 제주 4.3정신(클릭)3. 4월 동백을 본다면 제주 4.3을 떠올려보자
눈물마저 죄가 되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 제주 4.3의 흔적을 찾아 4월 2일부터 4일까지 다녀온 역사탐방을 3회에 걸쳐 나눠 적는다. 역사탐방은 제주도 초청으로 경남을 비롯한 전국 14개 시도 파워블로거와 SNS기자단, 공무원 90여 명의 에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명예기자 자격으로 다녀왔다. 팸투어 이야기를 3회로 나눠쓴다.글 싣는 순서1. 섬뜩한 진실과 마주하는 제주 4.3기념관(클릭) 2. 꽃 피워라 제주 4.3정신3. 4월 동백을 본다면 제주 4.3을 떠올려보자 정부의
툭 하고 동백이 질 때면 제주도로 떠나야 한다. 동백을 보러, 흉터를 보러 갈 때다. 시간이 흐르면 그날의 기억은 흐려진다.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더구나 침묵을 강요받았던 그 날의 상처는 이제 봄이면 동백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로 다가온다. 흉터는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눈물마저 죄가 되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 제주 4.3의 흔적을 찾아 4월 2일부터 4일까지 다녀온 역사탐방을 3회에 걸쳐 나눠 적는다. 역사탐방은 제주도 초청으로 경남을 비롯한 전국 14개 시도 파워블로거와 SNS기자단, 공무원 90여 명의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믿음만으로 시작된 구두장이의 삶덕미양화점은 중앙시장 터줏대감 격이다. 그만큼 오래된 곳이다. 인터뷰 할 곳을 추천 받기 위해 시장번영회를 찾았을 때도 첫 번째로 추천 해준 곳이 덕미양화점이었다. 점포는 시장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공영주차장을 기준
"잘 먹을 게요. 열심히 하세요.” 피자를 배달해주고 가는 젊은이의 등에 대고 내가 한 말이었다. 이 산골에 들어오고 십이 년이 흘렀지만 이렇게 집에서 피자를 시키기는 처음이었다.며칠 전 오후 낯선 젊은이가 마을에 나타났었다. 한 묶음의 전단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제법 많은 스티커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젊은이가 마을을 돌아나간 뒤 우리집 우편함에 전단지가 꽂혔고 스티커 한 장이 붙어있었다. ‘지정환피자 지리산점 오픈’ 임실치즈로 유명한 지정환피자를 이 산골짝에서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짠~ 이게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중앙시장 2층 비단길 청년몰 옆, 줄지어 있는 조용한 한복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문 앞마다 아지매들의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약속시간에 맞춰 문을 두드리니 반갑게 맞아주시던 박정순 아지매. 아지매 만큼 방안을 환히 비추는 햇살이 참 따뜻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아들은 이제 중3. 드디어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실체는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중2병에서.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화를 내다가도 PC방 갈 돈이 필요하면 쪼르르 달려와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그런 증세. 식탁에서 동생이 자기보다 큰 햄을 먹었다고 분노하는 그런 증세. 그러나 중2병은 단순히 학년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아들의 책상에서 그 사실을 입증할 단서를 발견했다. 그것은 A4용지 한 장을 빡빡하게 채운, 어떤 목록이었다.맨 위에는 제목이 크게 적혀있었다. ‘2019 버킷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