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록단 인터뷰] 덕미양화점 김용문 아재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 덕미양화점 김용문 아재와 그의 아내(사진 = 이준옥)

믿음만으로 시작된 구두장이의 삶

덕미양화점은 중앙시장 터줏대감 격이다. 그만큼 오래된 곳이다. 인터뷰 할 곳을 추천 받기 위해 시장번영회를 찾았을 때도 첫 번째로 추천 해준 곳이 덕미양화점이었다. 점포는 시장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공영주차장을 기준으로 큰 도로를 따라 중앙광장 쪽으로 오다보면 중앙시장 2층 건물이 끝나는 곳이 있다. 그 길로 돌아 들어오면 오래된 재봉틀이 눈에 띈다. 바로 덕미양화점이다.

▲ 진주 중앙시장에 위치한 덕미양화점(사진 = 이준옥)

유리 너머로 빼곡히 들어찬 구두들이 시선을 끌고 머리가 희끗한 사장님은 구두를 깁는 재봉틀 앞에 앉아 계신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무심한 듯 받아주신다. 오래된 휴대용 라디오에선 트로트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함께 계시던 사모님은 인터뷰를 하라며 가게 밖으로 자리를 피해주신다. 사장님과 건장한 청년 두 명으로도 가득 차는 아담한 규모의 소담한 가게다.

'믿음만으로 시작된 구두장이의 삶'

김용문 아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전에 인터뷰와 촬영을 진행했던 매체들을 소개하셨다. “6개월 전인가 KBS2 TV 나오고 또 서경방송에 두 번 나왔고, 신문에도 두 군데 났거든예. 중앙시장에 나만치 오래된 사람 없어.” 자부심이 느껴졌다. “저는 돈이 없어서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고, 그리고 제가 클 적에 고생을 마이 했어. 그런데 내가 일을 배운 양화점에서 나를 갖다가 일 배워서 하라케서 거서 일 배아가꼬 오늘날 까지 하고 있어. 그러니까 국민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있다가 시작했으니까 제법 오래됐지. 여서 일 한거 는 66년도에 불나가꼬 67년에 새로 지어가꼬 들어왔거든예. 그때부터 계속 여서 하고 있지.”

어떻게 중앙시장에 자리 잡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때 재향군인회 회장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여기 담배장사를 했으요. 그분은 재향군인회 사무실가서 일보시고 담배장사를 내한테 맡기놓고 다니셨어, 근데 몇 년 있더만 점빵보던 사람이 그만 두게 됐어, 그러니까 내를 보고 부르시더만은 니 양화점 안 할래? 그래. 그래서 내가 돈이 없어서 안 할람니다 그카니까 돈이 있고 없고 할래 안할래? 그러셔 그때가 추석 대목인데, 그 장군님이 나보고 양화점을 하라 그래. 돈을 대주겠다고. 그때 그분을 지금도 못 잊어요. 그럴 수 있었던 건 2년 동안 담배가게를 맡기면서 돈이 10원도 안 틀렸거든? 그러니까 나를 좋게 보고서는 밀어준기라. 그분 덕택이지.”

▲ 작업 중인 김용문 아재(사진 = 이준옥)

빈털털이 몸으로 신용만으로 일군 시작이었다. 그 뒤로는 진주 극장 앞에 있던 양화점에서 기술을 배웠다. 새벽잠 자며 4년 간 힘겹게 배웠다. 일일이 수공예 작업이라 손이 안 가는 일이 없었다. “옛날에는 일일이 손으로 못을 쳐가지고 손으로 댕기고, 바닥도 손으로 일일이 짚었고 참 어려븟으요.”

그 당시의 작업하는 모습을 재연해주시는 용문 아재. “아침에 사골국물 먹고 나와서 집에 갈라고 청소하면 11시30분 통금 사이렌 불거든예, 그라면 집에 가가꼬 밥먹고 누우면 12시라. 그러면 한숨자고 새벽에 나와가 일하고 그리했는데, 그게 몇 십 년.” 요즘은 구두가 한 물 갔다며 손을 휘저으시는 사장님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62년도에 군대 제대하고 와가꼬 15년 20년은 괜찮았지.” 당시만 해도 외출할 때 구두를 차려신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돈이 중하나? 사람 인정이 중하지"

장사를 오래하다보면 재밌는 추억거리도 생기기 마련이다. “옛날에는 중고등학생들 모자쓰고 학생복 입고 다녔다 아입니까. 그때는 진주중학교, 고등학교 입구가 한 개 삐 없었거든예. 몇 년 전에 남자 둘이 걸어오고 뒤에 서울 남바 단 차가 따라오는기라. 그래가 오더마는 맞다! 기다! 기다! 그카는 기라. 그래가 어서오이소, 와예? 쿠니까는 이야~내 고등학교 다니고 오늘까지 서울에 있다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옛 추억을 더듬어서 진주고등학교 입구부터 걸어 내려오고 있다 그래. 고등학교 다닐 때 담배 사러 오던 두 놈이 자기들이라 쿠데. 여까지 내려오는데 다 간판이 바뀌고 수복빵집하고 우리가게만 그대로다 카드라고.”

용문 아재는 10여년 전 자전거가 뒤에서 받아 넘어지며 머리를 다친 적이 있다. 그 당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젊은 학생이라 그대로 보냈는데 후유증은 아직 남아 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계신다. “그 사고 이후로 굉장히 오래됐는데 누가 안녕하십니까? 그케. 누군데요? 쿤께는 그래 이바구를 하는기라. 그때 자전거 부딪힌 사람이라고, 그래서 몸은 어떠냐고 묻고 돈줄라카는 거 그냥 보내삣어.” 가만히 듣고 있던 사모님도 한마디 거든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말이라도 어르신 어떴습니까 묻는게, 뭐, 돈이 중하나 사람 인정이 중하지.” 아지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악질 같아봐, 가만히 놔뒀겠어?” 용문 아재가 바로 받아서 맞장구 쳐주는 모습이 금슬 좋아 보였다.

"여가 삶의 터전이고 쉼터지"

▲ 김용문 아재와 그의 아내(사진 = 이준옥)

“옛날에 불나기 전에는 나무로 단층지은 집이라예, 슬레이트 같은 함석이라카는 거로 지붕을 이었거든예, 그러니까 군불 넣는 거 마냥 싹 대번에 타버린 기라. 그래가 새로 지었거든. 그때는 시청 땅에다 건물도 시청이 지은기라. 그래가꼬 민간에 팔았지.” 아재는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큰 사건이었다. 어렵게 재건한 건물에 자리를 잡고 일만 죽어라 하다 그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집안 형수되는 분이 집사람하고도 친척이라. 집사람 집안 고모. 그분이 중매를 선기라. 결혼을 31살에 했지. 일한다고 먹고 산다고 당시로는 늦게 한기라. 내가 나쁜놈 같았으면 집안 형수가 중매 해줬겠어?” 그렇게 만난 아내는 9살 차이가 난다. 아지매는 결혼하고 가게 직원들 밥을 해주며 남편의 일을 도왔다. 나중에는 옛 진주의료원 앞에서 포장마차 일도 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사는 게 일에 매여 자녀들 얼굴보기도 힘들었다는 아재. “애들 클 적에 가정교육이 참 무서운기라. 아침에 일찍 나오제, 저녁에 늦게 드가제, 애들 만날 일이 없어. 먹을 거 사 가꼬 애들 자는 머리맡에 올리 놓으면 일나서 묵고.” 그래도 반듯하게 자라 준 자녀들을 보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그래도 그 당시 좋은데 많이 못 데리고 간 것이 못내 아쉬운 아재다. “우리 클 때는 일한다고 돌아다닐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은 다리에 힘이 없어. 계속 앉아 가꼬 작업을 하니까 이게 직업병이라.”

눈길은 자연스레 아재의 허벅지로 향한다. 어딘지 앙상해 보이는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집에서 올 때 걸어 댕깄는데, 요즘에는 자전거 타고 댕기. 무릎 아프제 골반 아프제 그래가꼬. 너무 앉아 있어가꼬. 아파도 나올 데가 있으니까는. 나올 데가 없으면 추버도 누가 있고, 덥다고 누가 있고, 안 되는기라.” 아픈 아재의 삶에서 이곳이 얼마나 큰 버팀목인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여가 삶의 터전이고 쉼터지. 아고~좋은 세상 다 가삐고 저 세상 갈 때 다 되가니까 영 파이고만. 나이 들고 아들이 문열어주고 닫아주고 다해.”

그나마 요즘은 손자, 손녀들 보는 재미가 크다. 중학생 손자 자랑을 하면서 더 없이 인자한 웃음을 보이는 아재와 아지매다.

 

▲ 김용문 아재가 만든 구두, 구두 밑창에 덕미양화점이라는 마크가 새겨져 있다. (사진 = 이준옥)

“새해소망? 건강이 최고지”

그런 아재와 아지매의 새해 소망도 소박하다.

“내가 이제 돈 벌 욕심도 없고 넘 줄 것도 없고 받을 돈도 없고, 벌어가지고 손자들 과자값이나 좀 주고 마누라랑 내랑 병원비나 벌면 되고 새해 소망이라 카는 거는 다들 건강하기만 하면 되지.”

인터뷰를 마치고 많은 구두 사이로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는 아재가 직접 만든 구두를 한 번 더 확인 했다. 구두 깔창에 덕미제화 네 글자가 선명하다. 20여년 전 만든 구두라고 한다. 세월이 느껴지지만 짱짱한 모습이 아재를 닮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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