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걸이 저 걸이”가 “파랑새”로 이어진 역사 현장을 찾아서

- 진주농민항쟁기념탑 김종신 객원기자l승인2019.04.17l수정2019.04.18 15:20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 진주 수곡면 창촌리에 있는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매 줌치 장도칼(장독간),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157년 전 진주농민항쟁 때 백성들이 부른 우리나라 최초 혁명 가요다. 이 노래는 2년 뒤 동학농민항쟁 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로 이어졌다.

 

▲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을 찾으러 가는 길, 진양호를 지나간다.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의 흔적을 따라 나섰다.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를 찾아 진주시 수곡면으로 향했다. 찾아가는 아침, 진양호는 안개를 얕은 이불인 양 덮고 아침을 맞고 있었다. 진양호를 돌아 면소재지를 지나 하동군 옥종면과 경계인 수곡면 창촌리 창촌 삼거리 이르러 차를 세웠다.

 

▲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이 있는 곳에는 이순신백의종군로가 있다.

삼거리에 이름 없는 구멍가게 맞은편에 이순신 백의종군로라 적힌 표지석 뒤편에 진주농민항쟁 기념탑이 있다.

 

▲ 지난 3월 14일 157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진주농민항쟁 기념식 현수막

들어서는 입구에는 지난 3월 14일 열린 진주농민항쟁 기념식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진주시농민회·진주시여성농민회가 진주농민항쟁 기념광장에서 '진주농민항쟁 기념식'을 157년 만에 처음으로 열었다.

 

▲ 진주농민항쟁기념탑과 광장

진주농민항쟁은 1862년(조선철종 13년) 2월 14일(양력 3월 14일) 조선시대 말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전정·군정·환곡))의 문란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백낙신(白樂莘)과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을 비롯한 수령, 아전, 토호층의 수탈에 조선 민중이 들쳐 일어난 봉기다.

기념광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널따란 잔디밭을 밟았다. 걸을 때마다 풀이 머금은 물들이 함께한다.

 

▲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앞에 있는 안내문이 새겨진 빗돌.

기념탑으로 가는 왼쪽에는 안내문이 새겨진 빗돌이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조세제도가 문란해지고 수령과 아전의 비리와 토호의 수탈이 심해지자 이에 대항해 주민들이 장시를 철거하고 집단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진주농민항쟁은 1862년 2월 14일 덕산장 공격을 계기로 진주목 전 지역으로 확산되다가 2월 23일 농민군이 해산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 항쟁의 핵심 세력은 농민, 그중에서도 초군(樵軍‧나무꾼)이었다. 이 항쟁을 이끌었던 지도자로는 양반 출신의 류계춘 등이 있었다.

 

▲ 진주 대평면 당촌리 산중턱에 있는 진주농민항쟁을 이끌었던 지도자 류계춘의 묘. 당시 조선 조정은 경상우병사와 진주목사를 파직함으로써 군중을 달래는 한편 민란을 일으킨 주동 류계춘 등을 체포해 목을 잘라 효시했다.

이 항쟁을 계기로 농민항쟁은 삼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단순히 수탈에 대한 불만에 의해 폭발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당시의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사회운동은 더욱 거세어져 1894년 동학농민항쟁으로 이어지고 이어 일제시기 농민운동으로 발전해 간다. 이 탑이 세워진 곳은 당시에 수곡장이 서던 곳이다. 무실(수곡)장터는 항쟁이 시작되기 전인 2월 6일 많은 대중들이 도회(都會)를 열어 항쟁의 방향을 철시와 시위로 결정하고 이 여론을 주위로 확산시켜 나간 중요한 곳이다.”

 

▲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앞에 있는 기념 시비에는 정동주의 ‘하늘 농부’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을 새긴 빗돌을 지나면 맞은편에 정동주 시인의 ‘하늘 농부 ‘라는 시가 적혀 있다.

“農事(농사)는/ 하늘 뜻 섬기는 일/ 농부(農夫)는/ 사람을 섬기는/ 하늘외다/ 하늘보고/ 침 뺃지 말라/ 사람이 곧/ 하늘이니/ 人乃天(인내천)‧人乃天”

 

▲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주위에는 항쟁에 나서 죽은 이들의 이름 석 자가 새겨져 있다.

 

▲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은 나선형 계단이 하늘로 향하는 모양새다.

주위에는 항쟁에 나서 죽은 이들의 이름 석 자가 새겨져 있다. 기념탑은 나선형 계단처럼 차츰 올라가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름 석 자 하나하나 부르면서 탑을 돌았다.

 

▲ 진주농민항쟁 기념탑 주위 쉼터
▲ 진주농민항쟁 기념탑 주위로 덕천강이 흐른다.

기념탑 옆으로 남강의 지류인 덕천강이 흐른다. 덕천강 둑을 따라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매 줌치 장도칼(장독간),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 진주농민항쟁 기념탑 가까이에 하동 고성산성이 있다. 이곳은 1894년(고종 31년) 내정을 간섭하는 일본군에 맞서 서부경남 농민군 5,000여 명이 싸운 곳이다. 동학농민운동위령탑이 있다.

강 너머 가까이에 하동 고성산성이 있다. 1894년(고종 31년) 내정을 간섭하는 일본군에 맞서 서부경남 농민군 5,000여 명이 싸운 곳이다. 동학농민운동위령탑이 있다.

 

▲ 진주농민항쟁 기념탑 주위에서 만난 벚나무 꽃망울. 가을부터 온 힘을 다해 새로운 시절을 준비한 열정을 보았다.

기념탑으로 걸어가는데 벚나무의 꽃망울이 보입니다. 가을부터 온 힘을 다해 새로운 시절을 준비한 열정을 보았다. 발아래에는 진분홍빛 광대나물꽃들이 환하게 피었다. 꽃말처럼 ‘그리운 봄’을 여기서 본 하루다.

 

▲ 진주농민항쟁 기념탑은 착취하고 수탈하는 기존 사회체제에 체념하고 순응한 게 아니라 도전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장소다.

착취하고 수탈하는 기존 사회체제에 체념하고 순응한 게 아니라 도전했던 사람들을 기억해야한다. 기억하지 않으면 잊힌다. 사람답게 주인답게 살고자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 찾아 가는 길

https://map.naver.com/index.nhn?query=7KeE7KO864aN66-87ZWt7J-B6riw64WQ7YOR&enc=b64&tab=1

 

김종신 객원기자  haechansol@naver.com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종신 객원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언론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UPDATE : 2020.2.27 목 18:00
경남 진주시 남강로 691-1, 3층  |  대표전화 : 055-763-0501  |  팩스 : 055-763-0591  |   전자우편 dandinews@hanmail.net
제호 : 인터넷신문 단디뉴스  |  등록번호 : 경남 아02302  |  등록일자 : 2015년 1월 15일  |  발행일 : 2015년 3월 3일 
발행인 : 강문순  |  편집인 : 서성룡  |  청소년보호 책임자 : 김순종
Copyright © 2020 단디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