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간직하기

새 학기가 시작되고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아들은 이제 중3. 드디어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실체는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중2병에서.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화를 내다가도 PC방 갈 돈이 필요하면 쪼르르 달려와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그런 증세. 식탁에서 동생이 자기보다 큰 햄을 먹었다고 분노하는 그런 증세. 그러나 중2병은 단순히 학년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아들의 책상에서 그 사실을 입증할 단서를 발견했다. 그것은 A4용지 한 장을 빡빡하게 채운, 어떤 목록이었다.

맨 위에는 제목이 크게 적혀있었다. ‘2019 버킷리스트’ 우와~ 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았어? 그렇지, 사람이 꿈을 크게 가져야지. 근데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건스톰 베레타, 토이스타 글록 17, 아카데미 시그P226, 토이스타M16A3FV, 발터PPK... 아들의 버킷리스트에는 알 수 없는 외계어들이 가득했다.

▲ 재인 초보엄마

알고 보니 그것은 아들이 사고 싶어 하는 ‘장난감 총’의 목록이었다. 아들이 하나하나 설명했지만 내 귀엔 그저 ‘장난감 총’으로 들렸다. 중3이나 되는 녀석이 장난감 총에 빠져있다니.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가격이었다. 적게는 몇 만원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까지 호가하는 고가품이 수두룩했다. 한마디로 장난이 아니었다.

아들의 일주일 용돈은 1만 2천원.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한 달이면 4만 8천원. 한 달 내내 쫄쫄 굶어도 명단에 있는 장난감 총 한 자루 살까말까 였다. 그럼에도 녀석의 꿈은 원대하고 치밀했다. “그래서 요즘 하루에 3천원씩 모으고 있잖아요.” 올 초에 아들은 스마트폰을 쓰지 않으면 하루 3천원씩 적립하는 계약을 우리 부부와 맺었다. 처음에는 나도 ‘옳다구나!’ 싶었다. 끈덕진 스마트폰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면 하루 3천원쯤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하거나 아님 그냥 책을 봐도 3천만 원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은 스마트폰을 하지 않는 대신 시커먼 장난감 총을 갖고 놀았다. 무슨 복잡한 이름들을 잔뜩 소개했지만 알아듣기 어려웠다. 긴 총이나 짧은 총이나 그래봤자 장난감 총이지. 아들은 그 안에 비비탄을 넣고 쏘아댔다. 두다다다다다... 비비탄이 발사되는 소리는 한여름 장대비가 양철지붕에 쏟아지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우리 집에 장대비가 퍼붓는 시간은 대개 저녁식사 이후 10분 정도. 혹시 눈을 다칠까봐 보안경도 따로 샀다. 제법 장비를 갖춘 녀석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신나게 장대비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며칠 뒤 경비 아저씨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저녁 시간에 미싱기를 시끄럽게 돌리는 집이 있어 층간소음을 유발하니...” 나는 단박에 알아챘다. 그것이 아들의 비비탄 총소리라는 걸. (물론 어디선가 미싱기를 실제로 돌리는 집이 있을 수도 있지만, 미싱기에서 그렇게 큰 소음이 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은 놀이터에 나가서 총을 쏘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내 돌아왔다. “좀 부끄럽더라고요.” 하긴 다 큰 녀석이 보안경을 쓰고 놀이터에서 장난감 총을 쏘고 있으면, 누구나 가던 걸음 멈추고 다시 한 번 돌아볼만 하지.

한참 고민하던 녀석이 방법을 찾았다. “엄마, 소음기 달면 해결돼요!” 과녁도 최대한 소리가 적게 나는 걸 연구했다.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 수거함을 뒤져서 빈 박스와 택배 물품을 포장하는 뽁뽁이를 가져왔다. “여기다 쏘면 소리도 안나고 퍽퍽 꽂히는 맛도 있을 거야~” 에휴. 그게 그렇게 하고 싶냐? 총 쏘는 게 왜 좋냐고 물었더니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비비탄 총알이 과녁에 꽂힐 때 손맛이 끝내준다고. “엄마도 한번 해볼래요? 직접 쏴봐야 맛을 알아요!”

얼떨결에 녀석이 건네주는 총을 잡았다. 퍽, 퍽. 두 발을 쏘았는데 한발은 박스에, 한 발은 뽁뽁이 한 가운데 명중. “어때요? 신나죠? 재밌죠?” 녀석의 말대로 약간의 짜릿함이 있었지만 나는 금방 총을 넘겨주었다. 철부지 아들과 내가 같을 순 없지.

이후로도 아들은 5분, 10분씩 방문을 닫고 이불을 향해, 뽁뽁이를 향해 스트레스를 풀었다. 소음기를 장착하니 시끄러운 건 덮였지만 이번엔 구석구석 나뒹구는 비비탄 총알이 골치였다. 이불 사이, 방바닥 모서리, 책장 틈새... 어디서든 총알이 굴러다녔다.

으이그. 손톱보다 작은 총알은 줍기도 어려웠다. 투덜거리며 아들의 방을 청소하던 어느 날, 책 사이에서 뽁뽁이 뭉치를 발견했다. 이런 것도 제대로 치우지 않다니. 화가 나서 아들을 불렀다. 얼른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방이 엉망이라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 아들은 뽁뽁이를 쓰레기통에서 다시 꺼냈다. “이건 버리면 안돼요. 엄마가 처음으로 쏜 총알이라고요!” 녀석이 펼친 뽁뽁이에는 하얀 총알 하나가 화석처럼 박혀있었다.

그날 이후 나의 버킷리스트 목록이 추가되었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아들한테 공부를 더 시킬까, 어떻게 하면 스마트폰을 멀리 하고 책을 좀 더 읽게 할까, 아들에게 뭔가를 시키는 쪽에 몰두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하면 너를 더 이해할 수 있을까’에 마음을 써보려 한다. 아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간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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