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채소가 있다. 흙 내음 밴 단단한 몸통, 베어 물면 시원하게 번지는 단맛. 바로 ‘겨울 무’다. 흔해서 소중함을 잊기 쉽지만, 사실 겨울 무는 오랜 세월 우리 식탁을 지켜온 든든한 보약이다.
무의 제철은 10월에서 12월로 대게 가을에 수확해 겨울 내 땅 속에 묻어두고 꺼내 먹던 무는 매운맛이 사라지고 단맛이 깊어진다. 그래서 “가을 무는 보약보다 낫다”, “겨울 무를 먹고 트림하지 않으면 인삼보다 못하다”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흔한 채소지만 제철 무의 진가를 아는 우리 조상들의 감각이 놀라울 정도다.
싱싱한 무를 고르는 요령은 단순하다. 잎은 푸르고, 몸통은 단단하고, 잔뿌리가 적은 것. 특히 뿌리 쪽이 통통하고 잎 가까운 부분이 파랗게 잘 올라온 무가 맛이 좋다.
진주 ‘대평무’가 전국 김장시장에서 이름을 떨치던 시절도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 이 지역 무는 단단하면서도 시원한 단맛으로 상인들이 줄을 이었고, 무씨 한 홉과 쌀 한 되를 맞바꿀 정도로 귀했다. 그러나 남강댐 완공으로 주산지가 수몰되며 그 명성은 역사 속 전설이 되어버렸다.
무는 크기가 커 한 번에 다 먹기 부담스럽지만, 토막마다 알맞은 쓰임새가 있다. 위쪽의 푸른 부분은 당도가 높아 생채로 제격이고, 가운데는 조직이 단단해 조림이나 나물에 좋다. 뿌리 끝으로 갈수록 매운맛이 강해져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때 감칠맛을 더한다. 보관은 흙이 묻은 그대로 신문지에 싸 5℃ 정도의 서늘하고 햇볕 들지 않는 곳에 두면 오랫동안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다.
요즘은 무로 색다른 요리를 펼쳐보는 재미도 있다. 대표적으로 ‘마파무조림’이 있다. 두부 대신 큼직한 깍둑무가 들어가는 마파무는 무가 충분히 부드러워질 때까지 돼지고기, 마늘, 대파와 함께 볶아 깊은 감칠맛을 낸다. 은근히 우러난 매콤·달큼한 양념이 스며든 무는 어른 입맛도, 무를 꺼려하는 아이들 입맛도 사로잡는다.
또 하나는 무를 두툼하게 썰어 스테이크처럼 구워내는 ‘무 스테이크’. 다시마 육수에 살짝 익힌 뒤 팬에 노릇하게 굽고 간장과 맛술, 생강, 굴소스로 만든 소스를 입혀 조리면 된다. 달큰함 속에 은근한 불향이 살아나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뚝딱 비울 만큼 맛이 좋다.
간단한 요리를 원한다면 ‘무전’도 좋다. 데친 무 두 장 사이에 볶은 다진 고기를 넣고 밀가루와 계란물을 입혀 지지면 고소함과 촉촉함이 어우러진 별미가 된다.
무가 겨울철에 꾸준히 사랑받는 건 맛 때문만은 아니다. 비타민 C 함유량이 딸기의 두 배에 가까울 정도로 풍부하고, 껍질 부분에는 속보다 두 배 가까이 더 많다. 소화효소도 다양해 생채나 깍두기처럼 생으로 먹으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리그닌 같은 식이섬유는 장 속 노폐물을 청소하고 변비를 완화한다. 동의보감에서도 무를 ‘오장의 나쁜 기운을 씻어내고 기침과 가래를 삭인다’고 적었을 정도다.
말린 무, 즉 무말랭이는 영양이 더 응축된다. 건조 과정에서 칼슘은 10배, 철분은 20배 이상 늘어난다. 활동량과 햇빛이 줄어드는 겨울철, 뼈 건강을 챙기기 좋은 식재다.
치통이나 잇몸이 붓는 응급 상황엔 무를 갈아 붙이면 진통 효과를 볼 수 있고, 무를 깍둑 썰어 꿀에 재워 우러난 물은 기침과 목 통증 완화에 도움을 준다. 무 한 토막이 이렇게 폭넓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겨울 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요롭고 유용하다. 겨울 밥상 위 한 토막의 무가 제철의 기운을 담아 우리 몸을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올겨울엔 무 한 덩이로 계절의 지혜를 더 깊게 즐겨보는 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