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한 진실과 마주하는 제주 4.3기념관

제주 4.3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 김종신 객원기자l승인2019.04.14l수정2019.04.1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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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하고 동백이 질 때면 제주도로 떠나야 한다. 동백을 보러, 흉터를 보러 갈 때다. 시간이 흐르면 그날의 기억은 흐려진다.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더구나 침묵을 강요받았던 그 날의 상처는 이제 봄이면 동백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로 다가온다. 흉터는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눈물마저 죄가 되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 제주 4.3의 흔적을 찾아 4월 2일부터 4일까지 다녀온 역사탐방을 3회에 걸쳐 나눠 적는다. 역사탐방은 제주도 초청으로 경남을 비롯한 전국 14개 시도 파워블로거와 SNS기자단, 공무원 90여 명의 <제주 4.3 역사 바로 알기 역사탐방>에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경남이야기> 명예기자 자격으로 다녀왔다. 팸투어 이야기를 3회로 나눠쓴다.

정부의 공식 보고서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제주 4.3’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제주 4.3사건으로 제주도 중산간 마을의 95%가 쑥대밭이 되어 사라졌고 제주도 인구의 10%에 이르는 3만 명의 제주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눈물마저 죄가 되었던 그 날의 흔적 찾아 제주도로

 

첫날 제주 4.3의 상징은 동백꽃 배지를 원희룡 제주지사 등이 참석한 시도 대표자에게 달아주는 행사가 있었다. 이어 <제주 4.3과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서귀포교육지원청 한상희 장학사의 강의를 들었다. 역사탐방에는 한 장학사와 제주 4.3 전문가로 《4.3은 말한다》를 쓴 김종민 전 4‧3 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이 함께 길라잡이 해주었다.

 

강의가 끝난 뒤 간 곳은 제주 4‧3평화공원 내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제주 4.3 기념관이다. 4.3의 역사를 담은 그릇 모양이다. 공원 입구에서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는 팽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여느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자나무들이 반겨주는 곳이라 아늑하다.

 

제주 4.3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날,

비문이 새겨지고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져

 

단순히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등을 관광하러 온 이들에게 전시관은 섬뜩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학교에서 제주 4·3사건을 ‘반란’ 또는 ‘공산폭동’으로 배운 나는 기념관에서 혼란스럽다.

 

기념관에 건물 들어서는 왼편에 커다란 동백이 먼저 반긴다. 건물에 들어서면 ‘어둠에서 빛으로’라는 글자가 적힌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본격적으로 관람에 나서면 컴컴한 동굴을 지난다. 동굴을 나오면 아무것도 적지 않은 백비(白碑)가 어서 오라는 듯 반기지만 서서 반기는 게 아니라 누워서 반긴다.

 ‘제주 4.3’을 ‘사건’으로 적고 있지만 ‘사건’이라는 단어로 그날의 참상을 담기에는 부족하다. 제주 4.3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뒤 한반도의 38도 선 이남 지역을 점령해 통치하던 미군 점령기(미 군정기)에 일어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가 있기까지 7년 7개월 동안 이곳에서 벌어진 무력충돌과 진압에 당시 제주도민의 1/10인 3만여 명이 희생당한 사건을 아우른다.

 

백비 위로 뚫린 둥근 틈새로 하늘의 빛이 내려와 앉았다. 4.3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날 비로소 비문이 새겨지고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질 것이다.

 

제주 4·3에는 뒷말은 쉽게 붙이지 못한다.

 

광복 이전 7만여 일본군의 요새로 변한 제주도를 시작으로 제주 4.3 이야기를 관람할 수 있다. 광복 이후 일본기가 내려진 거리에 성조기가 펄럭였다.

 

4.3사건의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집회였다. 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였는데 기마 경찰은 그냥 지나갔다. 민중이 돌을 던지고 경찰을 쫓아오자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이 죽었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도민들은 경찰 발포에 3.10 총파업으로 항의했다.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로 단정하다

 

미 군정은 카스티어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미군 보고서는 파업원인을 ‘경찰 발포로 도민이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제주도 인구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적었다. 한술 더 떠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말까지 했다.

 

이에 좌익 색출을 명분으로 극우청년단인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로 들어왔다.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았다. 검거 선풍으로 3.3평 유치장에 35명을 수감 했다. 고문치사로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둘째 아들도, 며느리도, 큰아들도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걱정하지 말라면서 떠나갔는데 아무도 안 돌아와.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 백 년이고 아들을 다시 보기 전에 죽을 수 없어. 절대로 죽을 수 없어….” 양은하 어머니(고 윤희춘) 증언이 가슴이 먹먹하게 한다.

 

“탄압하면 항쟁이다!”

 

이에 맞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에 나섰다. 무장대는 초기 350명이었고, 전 기간 통틀어 500명을 넘지 못했다. 4.3봉기 당시 무기는 일제 99식 총 2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이고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문득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우금치 전투가 떠오른다. 조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일본군의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을 비롯한 최신식 무기에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무장대는 “탄압이면 항쟁이다!”라고 외치며 “경찰과 우익 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 독립”을 무장봉기의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5·10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해 선거기간에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제주도는 3개의 선거구 중 2곳(북제주군 갑구와 을구)의 선거가 무산되었다.

 

불타는 섬, 제주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

 

당시 사태 원인과 해결을 놓고 군경은 대립했다. 1948년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과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비밀회의를 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4.3사건을 ‘계획된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며 강경작전을 주장했다. 김익렬 연대장은 입산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경찰의 실책이라고 분석하면서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하고 무력위압과 선무공작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조병옥과 몸싸움을 벌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쫓겨났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는 제주지구 미군 사령관 브라운 대령의 말처럼 초토화 작전을 전개, 4.3 관련 희생자 대부분이 이 당시 희생되었다.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제주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지옥이 있다면 당시 제주도가 그러했으리라.

 

원통형의 하얀 방으로 들어서자 벽에는 죽음의 다양한 형상들이 부조물로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기억의 자살’을 강요당한 섬사람들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도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비롯해 예비 검속자를 학살하라는 상부의 부당한 명령을 문형순 경찰서장과 같은 의인들이 있었다.

4.3이라는 광풍이 지나간 뒤에도 연좌제의 피해는 곳곳에 있다. 붉은색을 지우려 안간힘을 섰다. 심지어 전쟁 때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해병대 3~4기 대부분이 제주도민이었다. 군, 경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혈서까지 쓰며 입대했다.

 

“기억을 말살당하는 곳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기억이 말살당하는 곳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주검과 같은 존재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인 것입니다. (소설가 김석범)”

 

진실 규명의 역사, 진실 찾기 위해 끊임없는 시도가 있었다. 올해 제3회 제주 4.3평화상을 받은 소설가 현기영은 <순이삼촌>처럼 당시의 참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정이 넘자 이 집 저 집에서 곡성이 터져 나왔다.

음력 섣달 열 여드렛날 5백 위가 넘는 귀신들이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큰 당숙어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이삼촌은 죽어도 벌써 죽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밭을 에워싸고 벼락같이 총질하는 속에서 시체 더미에 깔려 살아났으며,

그 때 이미 정신이 어긋났으리라는 것이다.-소설 <순이삼촌> 중에서”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

 

요구는 오랜 기간 도민의 투쟁 때문에 2000년 1월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다. 4.3 유족회와 제주 경우회는 화해를 선언했다.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했다. 제주 4.3이 화해와 상생의, 인류의 보편타당한 인권의 상징으로 드러난 것이다.

 

상설 전시장의 맨 끝 출구통로는 4.3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어두운 터널이다.

희생자를 기리는 한편으로 어두운 터널을 나와 다시 영광 천지로 나오는 재생의 공간이다.


김종신 객원기자  haechanso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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