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점수 몇 만점을 드려도 부족한 내 할머니

1년에 10시간~15시간, 아들은 봉사활동을 한다.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거나 관공서 등지에서 잡다한 심부름을 하고 도장을 받는데, 그 봉사점수가 내신에도 반영된다. 따라서 정확한 시간 확인이 필수. 이쯤 되면 말이 봉사활동이지 일종의 비즈니스 활동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처음엔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던 녀석도 3년쯤 하다 보니 이력이 붙었는지,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장소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점수 따기 용이라도 기왕이면 좀 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 좋을 텐데. 덩달아 나도 사방으로 레이더를 돌리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었다.

바로 노인 요양 시설. 나의 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시다가 몇 해 전,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셨다. 어쩌면 ‘갑자기’가 아니라 ‘서서히’ 진행됐을 수도 있는데. 도시에서 제 앞길만 바삐 가던 나머지 가족들에겐 그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 재인 초보엄마

할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하신 이후에도 당연히 돌봄이 필요했다. 처음 몇 해는 가족들이 집에서 모셔보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오로지 노인 수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전담인력이 필요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이 시설에 모시자는 것. 맞닥뜨려 보니 주변에 각종 노인 병원이나 요양시설은 많았지만 막상 내 집처럼 편안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지금의 시설을 만났다. 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두 번 할머니를 뵈러 간다.

그날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할머니 입에 요플레를 떠드리고 있었다. 복도에 웬 학생들이 서너 명씩 왔다 갔다 했다. 명찰을 보니 봉사활동 나온 학생들이었다. 그럼 아들도 여기서 봉사활동이 가능해? 나는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목욕탕에서 뛰쳐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정이 이랬을까. 노인 요양 시설은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한대도 탁한 공기가 감지되기 마련인데 그날은 산뜻한 공기가 폐까지 들락날락 했다.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당장 아들을 불렀다. “봉사활동 어때? 점수 따야지!” 아들은 싫다고 했다. 지금은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나 뭐라나. 아들의 눈이 허공으로 달아났다. 그래도 기회는 많으니까. 나는 입맛을 다시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엊그제 주말, 아들과 함께 요양 시설을 다시 찾았다. 어버이날도 있고, 봉사활동도 있고 그야말로 겸사겸사.

봉사활동 일정은 예상대로 수월했다. 내가 할머니 침대 앞 간이식탁에 준비해온 간식을 펼치는 사이 아들은 사무실에서 간단한 봉사수칙을 들었다.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여쭈었다.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는지, 점심은 남기지 않고 드셨는지, 이 날씨에도 솜이불이 덥지 않은지 등등. 할머니는 간밤에 잘 잤고, 점심도 한 그릇 다 비웠으며, 추위를 많이 타서 요즘도 솜이불을 걷으면 서늘하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비록 거동이 불편하긴 해도 정신이 맑고 말씀을 잘 하시는 편이다. 헌데도 오랜 투병으로 세상과 단절된 생활에 일상적인 대화를 길게 이어가긴 어려웠다. 잠시 어색한 침묵. 다음 말을 찾던 나는 나무 등걸처럼 꼬부라진 할머니 손을 내려놓고 복도로 나갔다. 아들이 걸레를 들고 창틀의 먼지를 닦고 있었다.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주려는데 녀석이 저만큼 도망가 버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다시 할머니 앞에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먼지를 터는 아들의 손이 보였다.

눈으로 아들을 따라 부지런히 먼지를 털어가면서 할머니께 아이들 크는 이야기를 해드렸다. 큰애는 그새 키가 훌쩍 자라서 교복이 작아졌고, 둘째도 이제 초등학생이라고. 할머니는 누워서도 아이들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셨다. 나는 또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들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1층까지 내려갔다. 로비에 백발의 노인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주변을 배회하던 치매 노인도, 휠체어에 몸을 기댄 노인도, 빙 둘러앉아 뭘 하시나? 봤더니 한가운데 소파에서 아들이 수건을 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치 동지섣달 꽃 본 듯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노인들. 고요한 눈빛에 가족과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스쳐갔다.

그렇게 정해진 일정을 마치고 아들은 봉사활동 도장을 받았다. 일하시는 분들께 꾸벅 인사를 하고, 할머니께도 다시 한 번 손을 잡아드렸다.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때까지 식사 잘하고 계세요.” 할머니는 허공을 향해 구부러진 손가락을 높이 들어 잘 가라는 인사를 대신하셨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에 비친 얼굴이 좀 민망했다. 할머니가 정정하실 땐 어린 나를 애지중지 돌봐주셨는데. 그것도 모자라 이젠 내 아들까지 봉사점수를 받을 수 있게 해주시네. 그럼에도 몇 시간 동안 정작 할머니보다 아들의 동선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마른 침을 삼켜도 부끄러움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주차장을 나오는데 벚꽃이 진 자리에 푸른 잎들이 싱그럽게 손을 흔들었다. 평생 가족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오신 분들이 이제는 계절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누워계신다. 저 분들의 봉사점수는 몇 만점을 드려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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