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김장하 선생의 생일날, 시민들이 마련한 축하연 자리에서 김장하 선생이 인사말을 건네고 있다. 이 자리는 비밀리에 추진됐다. 김장하 선생이 반대할 게 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19년 김장하 선생의 생일날, 시민들이 마련한 축하연 자리에서 김장하 선생이 인사말을 건네고 있다. 이 자리는 비밀리에 추진됐다. 김장하 선생이 반대할 게 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김장하 선생님은 진주의 큰 어른이죠.” “제가 엇나가려고 할 때마다 정수리에 내려쳐지는 겨울철 냉수와 같다고 할까요? 선생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저를 다잡게 됩니다.” “선생님을 본받은 작은 김장하가 많아지면, 진주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요?” “학생시절, 명신고를 국가에 헌납하시는 모습에 훗날 저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죠.”

진주의 ‘참 어른’이자 시민사회의 후견인으로 평가받는 김장하 선생이 31일부로 남성당한약방 문을 닫는다. 이 소식에 진주시민들은 입을 모아 고마움과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조건 없는 지지와 후원을 받은 이들은, 김장하 선생을 잇는 ‘또 다른 김장하’가 되고자 노력하겠다며 “어른이 없는 시대, 진주에 참 어른이 있어 기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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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30일~31일 새 김장하 선생, 남성당한약방과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단디뉴스에 전했다. 이들은 김장하 선생이 있어 진주지역 문화와 역사가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김장하 선생이 보여줬던 삶의 철학이 자신들의 인생에 큰 울림을 주었다며, 그 철학을 본받아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30여년의 시간동안 지역대표서점으로 자리 잡은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는 김장하 선생이 있어 진주문고가 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큰 도움을 받았다면서다. 1990년대 초, 그가 운영하던 ‘책마을’ 상호를 ‘진주문고’로 바꿔 공간을 옮길 때, 고 박노정 선생의 중재로 김장하 선생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IMF가 닥쳤을 때 도움을 준 사람도 김장하 선생이었다는 것.

그는 “저 뿐만 아니라 진주 시민사회에서 김장하 선생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고마움을 표하고, 김장하 선생의 인생철학을 “무욕의 철학”이라고 평가했다. “본인을 내려놓고, 타인을 도와 그 도움이 민들레 홀씨처럼 사회 곳곳에 날아가 꽃피게 하는 사람”이 김장하 선생이라면서다. 그는 김장하 선생의 철학이 50년간 지역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장하 선생님은 제가 인생을 살며 헤매게 될 때, 한겨울 정수리에 차갑게 쏟아지는 냉수와 같은 분”이라며 “(김장하 선생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브레이크가 걸리고, 해이해질 때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 단디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김장하 선생의 그림자라도 밟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오랜 기간 여성운동을 해온 강문순 전 진주성폭력상담소장은, 진주여성민우회와 성폭력상담소 탄생배경에 김장하 선생이 있다고 했다. 1990년 중반 유치원 원장 성추행 사건이 불거진 직후 여성단체를 건립하려 할 때, 김장하 선생이 내민 손길이 진주여성민우회와 진주성폭력상담소를 건립하는 기초가 됐다면서다. 그는 “김장하 선생님은 내게 ‘진주의 큰 어른’”이라고 말했다.

남성진 진주문화연구소장은 김장하 선생을 진주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남성진 소장은 진주오광대와 진주솟대쟁이 복원작업에 김장하 선생과 함께 했고, 진주문화연구소 설립 시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진주문화연구소는 김장하 선생(남성문화재단)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진주 역사와 문화를 담은 서적 ‘진주문화를 찾아서’ 시리즈를 출판하고 있다.

그는 진주오광대와 진주솟대쟁이 복원 작업 당시, “김장하 선생님은 단순한 예능복원이 아닌, 당시 민중의 놀이였던 이들 놀이의 정신 또한 살려야 한다며, 그 정신을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말씀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자문을 구할 때면 진주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면서, 중심을 잡아주셨다. 진주문화와 역사에 대한 애정도 크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는 고 김수업 교수님을 오랫동안 모셨다. 김수업 교수님과 김장하 선생님 두 분은 ‘내 인생의 좌표’”라고 평가하고 “지역문화운동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일 앞에서 흔들리거나 약해질 때, 이 분들을 생각하면 채찍질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두 분 모두 내게 있어서는 ‘정신적 지주’와 다름이 없다”고 덧붙였다.

 

30일 남성당한약방을 찾아 고마움을 전한 극단 현장 단원들[사진=고능석 페이스북 갈무리]
30일 남성당한약방을 찾아 고마움을 전한 극단 현장 단원들[사진=고능석 페이스북 갈무리]

김장하 선생이 10여년 가까이 후원한 옛 진주신문 출신 서성룡 씨도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오랜기간 이어진 선생님의 후원으로 옛 진주신문이 운영될 수 있었다”며 “진주신문만이 아닌, 여러 단체들도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장하 선생님이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 선생님을 잇는 ‘작은 김장하’가 지역에 많아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김장하 선생이 10여년 간 진주신문에 고액의 후원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편집방향이나 기사를 두고 간섭한 적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10여년 간 진주신문이 후원받은 금액이 당시를 기준으로 10억여 원은 될 것”이라며 “그럼에도 김장하 선생님은 언론자유를 보장해주셨다. 말 그대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으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명신고등학교 8회 졸업생인 최승제 씨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김장하 선생이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명신고에 입학하고 한 학기가 지나 학교가 사립에서 공립으로 바뀌었다. 김장하 이사장님께서 학교를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하셨기 때문”이라며 “그날의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훗날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던 기억..”이라고 전했다.

극단 현장의 정대균 씨는 김장하 선생에 대한 고마운 일화를 전하며, “김장하 선생님이 없었으면, 극단 현장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90년대 초 연극 공간을 마련할 때, 김장하 선생이 큰 도움을 줬다면서다. 그는 “10년간 이 돈을 갚지 못했는데, 김장하 선생님이 돈을 돌려받을 생각이 없다며, 시민들을 위해 준 돈이니 시민을 위해 활동하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외에도 너무 많은 분들이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았다. 과거에 선생님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이들이 한약방에 몰려와 큰절을 했는데, 한약방이 좁아 길가에서 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도움 받은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어 형평운동과 남명학을 재조명하는 데도 김장하 선생이 알게 모르게 기여한 부분이 많은 걸로 안다고 덧붙였다.

한편 31일부로 남성당한약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김장하 선생을 찾는 지역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극단현장, 옛 진주신문 기자 등은 30~31일 남성당한약방을 방문해 김장하 선생에게 그간의 고마움을 표현했다. 극단현장, 극단큰들 관계자는 매년 명절마다 김장하 선생을 찾아 고마움을 표현해왔음을 전하고, 앞으로도 이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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